MBC 스페셜 - 재일동포(자이니치), 축구 그리고 세 개의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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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어장 - 무릅팍 도사 - 추성훈편
예전에 추성훈이 방송에 나와서 한국 국가대표되고 싶었지만, 편파판결로 탈락하고, 결국에는 일본인으로 귀화를 이야기한적이 있었는데, 같은 재일동포(자이니치)들로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주변인이 된듯한 이들의 모습을 가슴아프게 보여준 방송...
일본에서 한국인이라고 차별을 받다가, 한국에 가면 자신의 편이 되줄줄 알았는데, 쪽발이가 여긴 왜 와있냐는 말에 상처를 받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리 타다나리(이충성), 일본인으로 귀화를 해서도 한국인 일본대표라고 부르며 공격을 받고 산다고...
안영학은 이중 스파이라는 스포츠조선의 기사도 나왔는데, 한솥밥 조원희에게 비밀을 누설했다나...-_-;;

어찌보면 국적이라는것이 종이에 써있는 글자일뿐일수도 있는데, 그런것을 가지고 사람을 상처주고, 배척을 하는지 안타까울뿐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막상 그들은 대한다면 나의 태도는 어떨지 싶은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정대세의 남아공월드컵때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가 가가고 한다...

해외동포, 재일동포는 우리의 한민족이다라고 말하고, 선거권이나 주는 수박겉할기식의 접근보다, 그들을 진정 우리의 민족으로 인정할수 있는 법안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010 MBC 현대사 연속 기획>경술국치 100년 특집
“축구 그리고 세 개의 조국”
■ 기획의도
현재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자이니치) 수만 약 60만 명, 전체 재일외국인 가운데 약
28%! 

191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의 일체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간 날이다. 
대한제국은 소멸 됐고, 나라 잃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혹은 강제로 현해탄을 건
넜다.
해방이 됐어도 동족 간의 전쟁으로 조국은 두 동강이 났고,
더 이상 ‘조선’이라는 나라는 복구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터전을 잡았지만
남한, 북한,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온 재일동포에게
‘경술국치 100년’의 역사는 어떤 상처와 흔적을 남겼을까?

세 개의 조국을 앞에 두고 선택의 갈림길 위에 서 있는 재일동포 축구 선수들의 이야
기! 
과연 그들에게 국적은 어떤 의미이고, 마음에 품고 있는 조국은 어디일까.
국가 소멸 후, 국민과 재일동포들이 겪은 정체성 혼란과 아픔을 조명해본다.   
    
■ 주요내용 소개

1. 더 큰 무대를 향해 비상하는 분데스리거, 現 북한대표 정대세

“일본을 떠나 독일로 가지만, 세계에서 세계의 선수로 돌아오겠습니다.”
 -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 팀 고별전, 정대세 선수 인사말 中

재일교포 출신 축구선수 1호로 독일 분데스리가 보쿰 팀으로 이적 한 정대세 선수!
 지난 7월 14일, ‘울보 대세’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자신을 응원해 준 팬들 앞
에서 눈물을 보인 것. ‘대세 get the goal 대세 오오오’ 정대세 선수의 응원가가 경기
장 안에 울려 퍼진 감동의 고별식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태어난 곳은 일본, 국적은 한국, 소속은 북한대표인 정대세 선수의 특이한 이력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는 왜 북한
대표를 선택했을까? 북한대표의 꿈을 단념해야만 했던 사연, 북한 축구 적응기! 정대
세 선수의 진솔한 얘기를 들어봤다.  
“대세를 조선국적으로 바꾸기 위해 많이 힘써 주셨는데 절대 안 됐다, 처음으로
남편과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 정대세 선수 어머니, 리정금씨
“100% 국적을 바꾸지 못한다면 조선 대표가 되는 것은 무리이고 꿈을 포기하고, 단
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눈앞에 벽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
 정대세 선수

독일 가기 전, 4일 간 정대세 선수 밀착 취재! 피아노 치는 축구선수.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정대세 선수의 모습들을 공개한다.
 바쁜 일정 가운데 정대세 선수가 선택한 것은 강연. 그가 일본 명문대 와세다 대학
학생들 앞에 나섰다. ‘자이니치’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대표 팀에서 자신의 소집
을 거부했던 사연까지 그동안 들을 수 없었던 그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세 나라는 모두 저의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한국도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미래에는 일본에서 살고 싶다는 귀속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제 혼, 존재 의의
를 주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 대표로써 마음껏 발휘하고 있어요.” - 정대세
선수
 
 자이니치라는 자신의 출신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 독일에서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
게 된 정대세 선수. 프리시즌에서 4경기 연속골을 넣으며 정규시즌에서의 정대세 돌
풍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15일, 공식 경기 첫 출전! 그의 독일 생활을 단독으로 취재
했다. J리거가 되는 꿈에서 세계무대로 나가길 바랐던 그는 독일에서 또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자신의 플레이로 ‘자이니치’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정대세 선수,
그의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그가 선택한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다.

2. 자신의 뿌리를 지킨 한국계 일본인, 2008 베이징 올림픽 일본대표 이충성  
 
“저는 이충성입니다. 일본 국적으로 바꿔서 지금은 리타다나리입니다. (한국말
로) 말을 하고 싶은데요. 저의 한마디로 일본, 한국사람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되면 저도, 부모님도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마음이 괴로워지기 때문에 앞으로
는 일본어로 말을 하겠습니다.” - 이충성 선수

재일동포 출신 스포츠라이터 신무광씨. 그를 만난 취재진은 뜻밖에 얘기를 전해 들
었다.
재일동포 출신 축구선수 중에 일본으로 귀화한 선수가 있다는 것. 가수 아유미의 남
자친구로 언론에 소개 된 바 있는 리 타다나리! 바로 이충성 선수다.
 그는 19살 때 한국 청소년 대표라는 꿈을 안고 경기도 파주에 왔었다. 그러나 합숙
기간동안 언어․문화적인 장벽으로 꿈이 좌절 됐을 뿐 아니라 그의 세계관까지도 흔
들렸다.
 과연 파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일본인보다도 한국인들이 제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해서 한국에 갔던 거예
요. 그런 상황에서 ‘왜 자이니치 놈이 왔나’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은 아플 정도로
충격이었어요.”
- 이충성 선수

파주 합숙 훈련 후,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은 이충성 선수. 2년 뒤, 그
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조상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뿌리인 ‘이’
씨 성을 지킨 채... 
“자부심을 잊지 않는다고 할까? 저는 이것(성)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모양(형태)
을 남기고 싶었고, 충성이라는 이름을 잊고 싶지 않아요” - 이충성 선수
 
가족들은 그의 새 길을 축복해줬다. 그가 국적을 버렸다기보다는 축구를 선택했다
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택에 대해 좋은 시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총련계 할아버지들이 니 아들은 매국노야 왜 귀화를 해서 일본 사람이 되나?
미쳤나? 이런 말을 했어요” - 이충성 선수 아버지, 이철태씨
“국적은 뭐일까요? 기호일 수도 있고 종이 한 조각에 나와 있는 두 글자일 뿐이고...”
 - 신무광씨
  이충성 선수는 스물 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가 견뎌야 했던 힘든 시간들에 대
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재
걷고 있는 길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계 일본인의 삶, 왜 그는
험난한 길을 가야만 했을까.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조국은 어디입니까?”
 “저의 조국은 일본과 한국 두 개입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자이니치뿐일 것이고, 그것이 굉장히 행복해요“

한국대표의 꿈이 좌절 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던 이충성 선수,
마음의 조국은 ‘대한민국’이지만 그가 선택한 현실적인 조국은 일본이다.

3. 국적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 前 한국대표 박강조
 
“그때는 진짜 좋았다. 국적이 한국이니까 국내 선수 취급이니까”  - 박강조 선수
 “국적이 나를 구해줬다는 말을 강조는 했다” - 신무광씨
  10년 전, 한국대표팀 유니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박강조 선수.   J리그 입단 초
기 시절, 축구 선수로서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인생의 암흑기에 빠진 그에게 축구라는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해준 것이 한국 국적.
K리그 성남일화 팀 선수 테스트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K리거가
되는데 믿었던 국적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     
“재일동포 1호 용병이냐 한국인이냐로 논란이 많았다. 재일동포를 한국인으로 인
정한다는 판결을 얻어낸 것” - 전 성남일화 감독, 김학범
 
 그는 99년 성남일화 선수로 발탁됐고, 2000년 드디어 어릴 적부터 꿈꾸던 태극마크
를 가슴에 달았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일본에서 살아온 그는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는데...
“자이니치가 어중간하다 조선에 가면 재일동포, 일본에 가면 조선 사람, 한국에
가면 북쪽 사람” - 재일동포 출신이자 북한대표 선수, 안영학

부인을 따라 일본 국적을 취득한 딸, 세라.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한
국식 이름을 지어줬다. 딸, 세라가 아빠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까. 
 축구 꿈나무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축구교실을 연지 3년째. 일본 아이, 재일
교포 아이 국적 상관없이 꿈을 주고 싶어서 시작했다는 박강조 선수. 그는 꿈을 이루
는데 있어서 국적이 장애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매주 소속팀 훈련 후,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국적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줬다는 박강조 선수, 그가 선택한 조국은 ‘한국’이다.

재일동포들에게는 축구만이 유일하게 일본 땅에서
일본인을 이기는 싸움이었다. 축구는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세 개의 조국을 앞에 둔 정대세, 이충성, 박강조, 안영학 선수. 
이들은 축구 외에 다른 것, 국적이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국가 소멸이 과연 이들에게 어떤 혼란과 아픔을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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