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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는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는다.
라는 신문서평의 구절을 보고 읽게된 일본 사카모토 료마 평전...
하급무사출신으로 처음에는 개방에 반대를 했지만, 점차 세상을 알아가면서 개방을 적극추진하고, 막부중심으로 구성된 지방분권을 왕권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3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은 료마의 일생을 세세하게 쫒아가면 그린 책...
평전은 체게바라 평전을 읽고난후에 두번째인데, 솔직히 료마의 팬이나 메니아라면 모를까 읽어보라고 추천하기에는 조금 그렇다는...
쉽게 말해 몇월몇일에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고, 증거가 어떻고, 그때 상황이나 심정을 어땠을것이다하는 식의 내용으로 좀 답답한 느낌... 체게바라 평전은 그나마 좀 재미있게 구성된 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일본의 제일부자 손정의
그러고보니 예전에 손정의가 여려운 시절의 칩거를 하면서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을 통독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입해놓고, 몇권 보지도 못했는데, 그 책이나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그에대해서 좀 더 알고 다시 봐본다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사카모토 료마전(龍馬伝) - NHK 대하드라마 사극 시즌1 RYOMA THE DREAMER
<도서 정보>
제 목 : 사카모토 료마 평전 (원서 : 坂本龍馬)
저 자 : 마쓰우라 레이 저/황선종 역
출판사 : 더숲
출판일 : 200년 월
책정보 : 328쪽 | 450g | 145*210mm ISBN-13 9788996279556
구매처 : Yes24
구매일 : 2009/12/10
일 독 : 2010/2/18
재 독 :
정 리 :
<책 읽은 계기>
"어제의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는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는다." 료마는 동맹 성사 이듬해 막부 진영의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숨을 거뒀다. 33세 불꽃은 그렇게 졌지만 그 빛은 100년 넘게 남아 있다. 그 빛은 꿈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04/2009120401478.html
<미디어 리뷰>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꿈꾸며 고비마다 시대의 물줄기를 옮겼던
사카모토 료마의 불꽃같은 삶을 통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우리 현실의 해법을 찾는다!
사 카모토 료마는 '아사히 신문'이 뽑은 일본 천년의 리더 1위,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도 본받고 싶어한 인물이다. 그는 유연한 사고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으로 28세 때 목숨을 건 탈번을 하고 33세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자신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해운회사를 설립, 운영한 새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혼란한 시대를 개혁하려 했고, 탁월한 협상력과 타고난 돌파력으로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의 이와 같은 발상력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이 책은 료마에 대한 평전 중 가장 객관적인 시각과 치밀한 역사적 자료 고증, 깊이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는 판을 번역한 것으로,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넘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총 21컷의 사진 도판이 있어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저 : 마쓰우라 레이
1931 년 히로시마 현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을 거쳐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교토 시 역사편찬소 주간을 역임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모모야마가쿠인 대학 교수 등을 거쳐 현재 활발하게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가쓰 가이슈』『가쓰 가이슈와 막부 말기 메이지』『일본인에게 천황이란 무엇인가』『메이지의 가이슈와 아시아』『메이지 유신 사론』『도쿠가와 요시노부』『막부 말기 : 교토, 오사카 역사 여행』『요코이 쇼난』『검증 : 료마의 전설』『환력 이후』『신센구미』 『사카모토 료마 평전』등이 있다.
<줄거리>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꿈꾸며 고비마다 시대의 물줄기를 옮겼던
사카모토 료마의 불꽃같은 삶을 통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우리 현실의 해법을 찾는다!
국 내 최초로 마침내 『사카모토 료마 평전』이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평전은 일본에서 출간되고 있는 많은 료마 평전 중 가장 객관적인 시각과 치밀한 역사적 자료 고증, 깊이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사 이와나미 쇼텐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비롯한 소설을 제외하고는 평전으로는 국내 처음 출간되는 것으로, 그의 삶에 관한 밀도 있는 조명은 그동안 료마에 대한 새로운 자료와 책을 기다려왔던 국내의 많은 대중인문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료 마는 일본 ≪아사히 신문≫이 뽑은 일본 천년의 리더 1위,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로, 국내에서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학자들, 경영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삶에 대해 그동안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유연한 사고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으로 28세 때 목숨을 건 탈번을 하고 33세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당시 일본의 거물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새 시대를 열어왔다. 혼란한 시대를 개혁하려 했고, 탁월한 협상력과 타고난 돌파력, 기회를 창출하고 추구하는 그의 천재적인 발상력 등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지금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으로, 그의 치열한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눈,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혜를 선사한다.
총 21컷의 사진 도판은 읽는 이들에게 료마의 삶을 이해하고 역사와 뜨겁게 소통하는 데 많은 도움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는다”
현 대 일본 경영자들이 입을 모아 찬탄하는 신화와 같은 존재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자마자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유연한 발상력은 현대의 고뇌하는 경영자와 기획가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료마를 좋아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업인으로서는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료마의 천재적인 발상력을 빌리고 싶어했고 늘 “한 번뿐인 인생, 료마처럼 멋지게 살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료마를 좋아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손정의 회장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의 저자인 마쓰우라 레이는 ‘타고난 돌파력을 지닌 료마가 살아있었더라면……’ 하고 작가 후기에서 아쉬움을 드러낸다. 료마가 서른세 살에 죽었을 때 대정봉환을 단행한 요시노부는 서른한 살이었다. 소용돌이치는 교토의 정국에 그토록 전력을 기울인 료마가 살아 있었다면, 요시노부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도바 · 후시미 전쟁으로 ‘조정의 적’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토 쇼지로는 약속한 고마쓰 다테와키가 결국 고치에 오지 않자 미간에 내천 자를 깊이 그리며 교토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미 료마는 자객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제는 의지해야 할 사람이 교토에 없었던 것이다. 마쓰다이라 슌가쿠에게 달려가서 호소해보았지만 슌가쿠는 충분히 고토의 뜻을 이해했어도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돌파력을 타고난 서른세 살의 료마라는 존재가 그토록 컸던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누구인가(坂本龍馬, 1835. 1. 3~1867. 11. 15)
사 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 1. 3~1867. 11. 15)는 도사번[土佐藩]의 향사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에도[江戶]의 한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며 왕정복고와 서양문물을 거부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검술을 익히고 고향으로 돌아간 료마는 존왕양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성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가담하여 친(親)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가이슈의 설득에 큰 감동을 받게 됨으로써 그의 제자가 되고, 그의 영향으로 무역의 필요성을 느껴 고베(神戶)에 해운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후에 이 해운회사는 해군지원대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1866년에는 대립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이끌어내고, 그 이듬해에는 마침내 막부(중앙)와 번(지방)을 통일시켜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성사시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약 675년 동안 지속되었던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하지뢸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막부의 한 순찰대에게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암살되고 만다.
시골의 하급무사에서 격변의 시기에 시대의 중심으로 들어가 일본을 변화시킨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책속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머리말
제1장_제1차 탈번까지
제2장_가쓰 린타로의 객으로 들어가다
제3장_삿초밀약을 주선하다
제4장_가메야마 샤추에서 해원대로
제5장_ 신국가를 구상하던 중 교토에서 죽다
맺음말
연보
작가 후기
역자 후기
검술 수행
생모 고가 죽은 것이 료마가 열두 살 때였고, 처음 에도에 간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새어머니를 맞이한 것이 몇 살 때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기의 료마에게 나기카타의 명수 이요라는 존재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료마가 열네 살 때부터 히네노(日根野)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은 수많은 선행연구가 일치하고 있다(12~13세란 주장도 있다). 열네 살이라면 아마 이요가 오고 나서일 것이다. 히네노 벤지(日根野弁治, 본명은 기치젠吉善)에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을 하사받은 것이 열아홉 살인 가에이(嘉永) 6년(1853) 늦봄(음력 3월)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료가 교토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구리 류’는 야규(柳生)의 검술에 야와라 기술을 합친 무예로 오구리 니에몬(小栗仁右衛門)이 창시했다. ‘야와라’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지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을 살펴보면 주로 칼쓰는 법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도장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면허목록을 받자 료마는 더욱 심도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에도로 가게 된다. 당시 아버지 하치헤이 나오타리는 쉰여섯 살이었고 새어머니 이요는 쉰 살이었다. 아버지는 ‘수행 시 마음가짐 3개 조항’을 써서 료마에게 주었다.
한시도 충효를 잊지 말고 수행의 첫 번째 지침으로 삼아라.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금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색정에 빠져 국가의 대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가이슈 일기에 료마 등장
일 기에 쓰인 대로라면, 린타로는 육지에 내리기는 했어도 밤에는 배로 돌아온 듯하다. 그런 린타로에게 섣달그믐에 료마가 찾아왔다. “지바 주타로(千葉重太?)가 찾아왔다. 동시에 사카모토 료마군도 왔다. 교토에 대해 물었다.” 이튿날은 분큐 3년(1863), 새해 첫날이다.
“료마, 조지로, 주타로 외 한 명, 오사카에 갔다가 교토로 돌아갔다.” “어젯밤, 소견을 적은 초고 원고를 료마 군에게 맡겨 공경 댁에 갖다드리게 했다.”
전 날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곤도 조지로와 또 한 명이 뜬금없이 나오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 경위를 알 수가 없다. 이런 점을 괘념하지 않았던 것이 가쓰 가이슈 일기의 특징이다. ‘료마 군’이라고 료마에게만 ‘군’을 붙였다는 사실은 이미 머리말에서 언급했다. 엉성한 구석이 있지만 이런 점이 가치가 있다. 그리고 ‘공경 댁’은 아마 산조 사네토미의 집일 것이며, ‘소견을 적은 초고 원고’는 오가사와라와 함께 오사카 만을 돌아보고 정리한 의견서를 베껴 써놓은 것이리라.
이어서 9일자 일기에 “어제 도사 낭인 몇 명이 문하로 들어왔다. 료마 군과 작금의 형세에 대해 은밀히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뜻을 도와주었다.” 그 전날 8일에는 새벽에 조요마루(준도마루 호 대신 승선) 호에 인슈 돗토리(因州鳥取) 번의 영주 이케다 요시노리(池田慶?)와 오가사와라를 태우고 가다(加太)에 갔다가 오사카로 돌아왔고, “오가사와라 님은 숙소에 들어갔다”라고 적어놓았다. 일기상으로는 도사의 낭인들이 어디서 와서 입문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 제일인의 문하인으로
“사카모토 료마, 쓰치이 촌의 야스오카 다다사쿠(安岡忠?)의 차남 야스오카 가네마(安岡金馬), 항해술 수행을 받다.”
누 나 오토메에게 보낸 3월 20일자 편지에, 일본에서 제일가는 린타로라는 인물의 제자가 되었다고 적어 보냈다. 그때 린타로(麟太?)의 한자를 ‘燐太?’로 잘못 적었는데 있을 수 있는 일이리라. 편지는 “매일매일 이전부터 생각했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어지는데, 이는 넓은 의미에서 ‘항해’를 공부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 천하를 위해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서는 단순히 항해 기술을 익히고 있는 모습보다는 정치적인 색깔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형에게 상담을 했다. 당시 료마의 나이가 29세였으며, 형 곤페이는 쉰 살이었다. 그때 곤페이는 교토에 출장가 있었다. 료마가 이 3월 20일자 편지를 교토에서 썼는지 아니면 오사카에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23일에 오사카에서 출발한 준도마루 호를 탄 것이 아닌가 싶다. 준도마루 호는 외국 부교인 기쿠치 다카요시(菊地隆吉)와 메쓰케(目付) 스기우라 쇼이치로가 에도로 급히 가기 위해 사용되었다. 단, 스기우라의 일기에는 료마가 나오지 않기에 일말의 의구심이 남는다.
『추찬일화』의 사카모토 료마
의외로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추찬일화』는 『유방유묵』과 한 세트다. 처음에는 『망우첩』과 같은 구성으로, 고인의 서찰 또는 글이나 그림을 모각한 뒤 바로 밑? 그에 관한 설명을 새겨넣을 생각이었으며, 그런 편집 형태를 지정해놓은 제1차 안이 있다. 제2차 안에서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별책 활자판으로 작성한 『추찬일화』를 보면, 바로 옆에 고인의 서찰이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듯한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방유묵』에 당초에 예정했던 글과 다른 글을 새겨넣게 되어,급히 『추찬일화』에 실린 글을 수정해놓은 것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글이며, 사카모토 료마의 글은 결국 수정하지 못했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런 문제가 남아 있는 『추찬일화』이지만 가이슈가 료마에 대해 길게 써놓은 유일한 글이 실려 있다.
사카모토 군은 오래 전에 야심한 밤에 지바 주타로라는 검객과 함께 히카와에 있던 집에 찾아왔다. 내가 해군을 창설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자 끈기 있게 들었다. 크게 가슴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그는, 오늘 밤 공의 말에 따라서는 베어버리기로 다짐하고 왔다. 헌데 지금 공의 말을 듣고 나니, 진심으로 자신의 고루한 생각이 부끄럽다. 공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고 싶다,라고 했다. 그 뒤 그는 해군에 뜻을 두고 평온한 날이 없었다. 별지에 소개하는 글은 그가 쓴 해군과 부하에 관한 규약이다.
그가 예전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처음 사이고를 만났을 때 어떤 인물인지 종잡을 수 없어 탐색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헌데 그는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평했다. 실로 감탄할 만한 말이며 지혜로운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의 식견과 사려로 사람을 판단했다. 사이고를 평하는 말을 보면,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것이다. 그가 일생에 행한 일은 지금 세상에 전승되고 있으며 결코 헛되지 않았다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는다.
라는 신문서평의 구절을 보고 읽게된 일본 사카모토 료마 평전...
하급무사출신으로 처음에는 개방에 반대를 했지만, 점차 세상을 알아가면서 개방을 적극추진하고, 막부중심으로 구성된 지방분권을 왕권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가 30대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은 료마의 일생을 세세하게 쫒아가면 그린 책...
평전은 체게바라 평전을 읽고난후에 두번째인데, 솔직히 료마의 팬이나 메니아라면 모를까 읽어보라고 추천하기에는 조금 그렇다는...
쉽게 말해 몇월몇일에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고, 증거가 어떻고, 그때 상황이나 심정을 어땠을것이다하는 식의 내용으로 좀 답답한 느낌... 체게바라 평전은 그나마 좀 재미있게 구성된 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일본의 제일부자 손정의
그러고보니 예전에 손정의가 여려운 시절의 칩거를 하면서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을 통독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입해놓고, 몇권 보지도 못했는데, 그 책이나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그에대해서 좀 더 알고 다시 봐본다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사카모토 료마전(龍馬伝) - NHK 대하드라마 사극 시즌1 RYOMA THE DREA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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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제 목 : 사카모토 료마 평전 (원서 : 坂本龍馬)
저 자 : 마쓰우라 레이 저/황선종 역
출판사 : 더숲
출판일 : 200년 월
책정보 : 328쪽 | 450g | 145*210mm ISBN-13 9788996279556
구매처 : Yes24
구매일 : 2009/12/10
일 독 : 2010/2/18
재 독 :
정 리 :
<책 읽은 계기>
"어제의 나에게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는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는다." 료마는 동맹 성사 이듬해 막부 진영의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숨을 거뒀다. 33세 불꽃은 그렇게 졌지만 그 빛은 100년 넘게 남아 있다. 그 빛은 꿈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04/2009120401478.html
<미디어 리뷰>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꿈꾸며 고비마다 시대의 물줄기를 옮겼던
사카모토 료마의 불꽃같은 삶을 통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우리 현실의 해법을 찾는다!
사 카모토 료마는 '아사히 신문'이 뽑은 일본 천년의 리더 1위,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도 본받고 싶어한 인물이다. 그는 유연한 사고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으로 28세 때 목숨을 건 탈번을 하고 33세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자신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해운회사를 설립, 운영한 새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혼란한 시대를 개혁하려 했고, 탁월한 협상력과 타고난 돌파력으로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의 이와 같은 발상력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이 책은 료마에 대한 평전 중 가장 객관적인 시각과 치밀한 역사적 자료 고증, 깊이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는 판을 번역한 것으로,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넘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총 21컷의 사진 도판이 있어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저 : 마쓰우라 레이
1931 년 히로시마 현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을 거쳐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교토 시 역사편찬소 주간을 역임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모모야마가쿠인 대학 교수 등을 거쳐 현재 활발하게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가쓰 가이슈』『가쓰 가이슈와 막부 말기 메이지』『일본인에게 천황이란 무엇인가』『메이지의 가이슈와 아시아』『메이지 유신 사론』『도쿠가와 요시노부』『막부 말기 : 교토, 오사카 역사 여행』『요코이 쇼난』『검증 : 료마의 전설』『환력 이후』『신센구미』 『사카모토 료마 평전』등이 있다.
역 : 황선종
한 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일본 다이토분카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 일본어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인트랜스 번역원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ITS 번역아카데미에서 일어 번역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역서로는 『질문력』, 『경영에
대한 6가지 질문』, 『호감을 주는 영어, 반감만 사는 영어』, 『회사 그만뒀습니다』, 『설명의 테크닉』, 『남자의 품격』, 『미스터 CEO』,
『창조적 기업의 10가지 발상전환』, 『리얼머니 하트머니』『사카모토 료마 평전』 등이 있다.
<줄거리>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꿈꾸며 고비마다 시대의 물줄기를 옮겼던
사카모토 료마의 불꽃같은 삶을 통해 난마처럼 얽혀 있는 우리 현실의 해법을 찾는다!
국 내 최초로 마침내 『사카모토 료마 평전』이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평전은 일본에서 출간되고 있는 많은 료마 평전 중 가장 객관적인 시각과 치밀한 역사적 자료 고증, 깊이 있는 분석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사 이와나미 쇼텐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비롯한 소설을 제외하고는 평전으로는 국내 처음 출간되는 것으로, 그의 삶에 관한 밀도 있는 조명은 그동안 료마에 대한 새로운 자료와 책을 기다려왔던 국내의 많은 대중인문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료 마는 일본 ≪아사히 신문≫이 뽑은 일본 천년의 리더 1위,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로, 국내에서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학자들, 경영자들 사이에서는 그의 삶에 대해 그동안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유연한 사고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실천으로 28세 때 목숨을 건 탈번을 하고 33세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열정과 노력만으로 당시 일본의 거물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새 시대를 열어왔다. 혼란한 시대를 개혁하려 했고, 탁월한 협상력과 타고난 돌파력, 기회를 창출하고 추구하는 그의 천재적인 발상력 등은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지금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으로, 그의 치열한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눈,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혜를 선사한다.
총 21컷의 사진 도판은 읽는 이들에게 료마의 삶을 이해하고 역사와 뜨겁게 소통하는 데 많은 도움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는다”
현 대 일본 경영자들이 입을 모아 찬탄하는 신화와 같은 존재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자마자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유연한 발상력은 현대의 고뇌하는 경영자와 기획가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료마를 좋아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업인으로서는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료마의 천재적인 발상력을 빌리고 싶어했고 늘 “한 번뿐인 인생, 료마처럼 멋지게 살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로 료마를 좋아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손정의 회장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의 저자인 마쓰우라 레이는 ‘타고난 돌파력을 지닌 료마가 살아있었더라면……’ 하고 작가 후기에서 아쉬움을 드러낸다. 료마가 서른세 살에 죽었을 때 대정봉환을 단행한 요시노부는 서른한 살이었다. 소용돌이치는 교토의 정국에 그토록 전력을 기울인 료마가 살아 있었다면, 요시노부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도바 · 후시미 전쟁으로 ‘조정의 적’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토 쇼지로는 약속한 고마쓰 다테와키가 결국 고치에 오지 않자 미간에 내천 자를 깊이 그리며 교토로 올라왔다. 하지만 이미 료마는 자객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제는 의지해야 할 사람이 교토에 없었던 것이다. 마쓰다이라 슌가쿠에게 달려가서 호소해보았지만 슌가쿠는 충분히 고토의 뜻을 이해했어도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돌파력을 타고난 서른세 살의 료마라는 존재가 그토록 컸던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누구인가(坂本龍馬, 1835. 1. 3~1867. 11. 15)
사 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 1. 3~1867. 11. 15)는 도사번[土佐藩]의 향사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 되던 해, 에도[江戶]의 한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며 왕정복고와 서양문물을 거부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검술을 익히고 고향으로 돌아간 료마는 존왕양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성된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가담하여 친(親)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가이슈의 설득에 큰 감동을 받게 됨으로써 그의 제자가 되고, 그의 영향으로 무역의 필요성을 느껴 고베(神戶)에 해운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후에 이 해운회사는 해군지원대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1866년에는 대립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이끌어내고, 그 이듬해에는 마침내 막부(중앙)와 번(지방)을 통일시켜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성사시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약 675년 동안 지속되었던 봉건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하지뢸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막부의 한 순찰대에게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암살되고 만다.
시골의 하급무사에서 격변의 시기에 시대의 중심으로 들어가 일본을 변화시킨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책속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머리말
제1장_제1차 탈번까지
제2장_가쓰 린타로의 객으로 들어가다
제3장_삿초밀약을 주선하다
제4장_가메야마 샤추에서 해원대로
제5장_ 신국가를 구상하던 중 교토에서 죽다
맺음말
연보
작가 후기
역자 후기
검술 수행
생모 고가 죽은 것이 료마가 열두 살 때였고, 처음 에도에 간 것은 열아홉 살 때였다. 새어머니를 맞이한 것이 몇 살 때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기의 료마에게 나기카타의 명수 이요라는 존재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료마가 열네 살 때부터 히네노(日根野)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은 수많은 선행연구가 일치하고 있다(12~13세란 주장도 있다). 열네 살이라면 아마 이요가 오고 나서일 것이다. 히네노 벤지(日根野弁治, 본명은 기치젠吉善)에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을 하사받은 것이 열아홉 살인 가에이(嘉永) 6년(1853) 늦봄(음력 3월)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료가 교토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구리 류’는 야규(柳生)의 검술에 야와라 기술을 합친 무예로 오구리 니에몬(小栗仁右衛門)이 창시했다. ‘야와라’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지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을 살펴보면 주로 칼쓰는 법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검술을 가르치는 도장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면허목록을 받자 료마는 더욱 심도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에도로 가게 된다. 당시 아버지 하치헤이 나오타리는 쉰여섯 살이었고 새어머니 이요는 쉰 살이었다. 아버지는 ‘수행 시 마음가짐 3개 조항’을 써서 료마에게 주었다.
한시도 충효를 잊지 말고 수행의 첫 번째 지침으로 삼아라.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금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색정에 빠져 국가의 대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가이슈 일기에 료마 등장
일 기에 쓰인 대로라면, 린타로는 육지에 내리기는 했어도 밤에는 배로 돌아온 듯하다. 그런 린타로에게 섣달그믐에 료마가 찾아왔다. “지바 주타로(千葉重太?)가 찾아왔다. 동시에 사카모토 료마군도 왔다. 교토에 대해 물었다.” 이튿날은 분큐 3년(1863), 새해 첫날이다.
“료마, 조지로, 주타로 외 한 명, 오사카에 갔다가 교토로 돌아갔다.” “어젯밤, 소견을 적은 초고 원고를 료마 군에게 맡겨 공경 댁에 갖다드리게 했다.”
전 날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곤도 조지로와 또 한 명이 뜬금없이 나오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 경위를 알 수가 없다. 이런 점을 괘념하지 않았던 것이 가쓰 가이슈 일기의 특징이다. ‘료마 군’이라고 료마에게만 ‘군’을 붙였다는 사실은 이미 머리말에서 언급했다. 엉성한 구석이 있지만 이런 점이 가치가 있다. 그리고 ‘공경 댁’은 아마 산조 사네토미의 집일 것이며, ‘소견을 적은 초고 원고’는 오가사와라와 함께 오사카 만을 돌아보고 정리한 의견서를 베껴 써놓은 것이리라.
이어서 9일자 일기에 “어제 도사 낭인 몇 명이 문하로 들어왔다. 료마 군과 작금의 형세에 대해 은밀히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뜻을 도와주었다.” 그 전날 8일에는 새벽에 조요마루(준도마루 호 대신 승선) 호에 인슈 돗토리(因州鳥取) 번의 영주 이케다 요시노리(池田慶?)와 오가사와라를 태우고 가다(加太)에 갔다가 오사카로 돌아왔고, “오가사와라 님은 숙소에 들어갔다”라고 적어놓았다. 일기상으로는 도사의 낭인들이 어디서 와서 입문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 제일인의 문하인으로
“사카모토 료마, 쓰치이 촌의 야스오카 다다사쿠(安岡忠?)의 차남 야스오카 가네마(安岡金馬), 항해술 수행을 받다.”
누 나 오토메에게 보낸 3월 20일자 편지에, 일본에서 제일가는 린타로라는 인물의 제자가 되었다고 적어 보냈다. 그때 린타로(麟太?)의 한자를 ‘燐太?’로 잘못 적었는데 있을 수 있는 일이리라. 편지는 “매일매일 이전부터 생각했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어지는데, 이는 넓은 의미에서 ‘항해’를 공부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 천하를 위해 힘을 기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서는 단순히 항해 기술을 익히고 있는 모습보다는 정치적인 색깔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형에게 상담을 했다. 당시 료마의 나이가 29세였으며, 형 곤페이는 쉰 살이었다. 그때 곤페이는 교토에 출장가 있었다. 료마가 이 3월 20일자 편지를 교토에서 썼는지 아니면 오사카에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23일에 오사카에서 출발한 준도마루 호를 탄 것이 아닌가 싶다. 준도마루 호는 외국 부교인 기쿠치 다카요시(菊地隆吉)와 메쓰케(目付) 스기우라 쇼이치로가 에도로 급히 가기 위해 사용되었다. 단, 스기우라의 일기에는 료마가 나오지 않기에 일말의 의구심이 남는다.
『추찬일화』의 사카모토 료마
의외로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추찬일화』는 『유방유묵』과 한 세트다. 처음에는 『망우첩』과 같은 구성으로, 고인의 서찰 또는 글이나 그림을 모각한 뒤 바로 밑? 그에 관한 설명을 새겨넣을 생각이었으며, 그런 편집 형태를 지정해놓은 제1차 안이 있다. 제2차 안에서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별책 활자판으로 작성한 『추찬일화』를 보면, 바로 옆에 고인의 서찰이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듯한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방유묵』에 당초에 예정했던 글과 다른 글을 새겨넣게 되어,급히 『추찬일화』에 실린 글을 수정해놓은 것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글이며, 사카모토 료마의 글은 결국 수정하지 못했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런 문제가 남아 있는 『추찬일화』이지만 가이슈가 료마에 대해 길게 써놓은 유일한 글이 실려 있다.
사카모토 군은 오래 전에 야심한 밤에 지바 주타로라는 검객과 함께 히카와에 있던 집에 찾아왔다. 내가 해군을 창설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자 끈기 있게 들었다. 크게 가슴에 와닿았던 모양이다. 그는, 오늘 밤 공의 말에 따라서는 베어버리기로 다짐하고 왔다. 헌데 지금 공의 말을 듣고 나니, 진심으로 자신의 고루한 생각이 부끄럽다. 공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고 싶다,라고 했다. 그 뒤 그는 해군에 뜻을 두고 평온한 날이 없었다. 별지에 소개하는 글은 그가 쓴 해군과 부하에 관한 규약이다.
그가 예전에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처음 사이고를 만났을 때 어떤 인물인지 종잡을 수 없어 탐색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헌데 그는 크게 두들기면 큰 답이 나올 것이며 작게 두들기면 작은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평했다. 실로 감탄할 만한 말이며 지혜로운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의 식견과 사려로 사람을 판단했다. 사이고를 평하는 말을 보면,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것이다. 그가 일생에 행한 일은 지금 세상에 전승되고 있으며 결코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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