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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시작한 사업에서 큰 실패를 보고 집도 날리고, 13년전에 빛만 1억 5천만원...-_-;;
갈곳이 없어 재개발동네에 숨어 살다가, 죽으려고 친구가 준 돈으로 소주에 수돗물을 안주삼아 먹다가 죽으려던 주인공...
빚이 많아서 어쩔수 없다는 하소연을 하지만, "그럼 평생 그렇게 살꺼냐"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전한다.
처음에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장사를 하는것을 보고 시작한 묵장사...
첫날부터 남들은 베터랑도 하루에 5상자를 파는것을 순식간에 팔아치우고, 보통 하루에 50상자를 팔아서
2년만에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_-;;;
그리고 점차 성장해서 판매상을 거쳐, 제조까지 시작해서 이제는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고, 장인정신을 가지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어려움은 화가 될수도 있고 복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튼 이충섭씨는 자신의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왔고, 남들을 따라하기 보다는 남들과 다르게 하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보란듯이 깨고 일어난것이 정말 감동적이였습니다...
"묵사발 인생 묵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묵사발 된 인생을 묵으로 보란듯이 일으킨 사람이 있다. 국내 1위의 묵 전문 식품회사를 경영하는 이충섭(41) 사장. 그는 유복한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볼트 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은 서울 장안에서도 손꼽히는 부자. 막내인 이씨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 아무 어려움 없이 지냈다. 그런 이씨에게 현실의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다닐 무렵이다. 평소 놀기 좋아하는 둘째형에게 부모님은이 사업을 맡긴 것이다. 돈은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둘째형이 사업을 하면서 어느새 그 많던 재산도 다 날리고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게 됐다. 충격을 받은 이씨의 부친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사업 실패로 13평 작은 집에서 열명 남짓한 가족들이 모여 살았죠. 등록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이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완구회사 경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7개월 가량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틀에 박힌 생활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죠.”요정에서 웨이터 생활도 하고 구두닦이, 때밀이 등 먹고살기 위해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군대 제대 후 이씨는 건강보조 식품회사에 영업직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지금의 부인 강민정(36) 씨를 만났다. “처음부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사장님 딸이라 부담은 있었지만….” 친구와 동업한 무역업 부도로 자살기도 안정된 직장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씨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만다. 친구와 무역업을 동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친구가 해외 영업을 담당하고 저는 국내 영업을 담당하기로 하고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사업자금이 필요했던 이씨는 집문서를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 사귀고 있던 강씨에게 경리 일을 맡기는 등 열정을 갖고 열심히 했지만 1년 만에 부도가 났다. “사업이란 것이 열정만 가지고는 안되더군요”부도가 나자 사채업자들은 이씨의 집에 찾아가 갖은 협박을 하게 되고 급기야 뇌경색을 앓고 있던 부친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이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자살을 결심하고 보름동안 술만 먹었습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더니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여기저기 방황하던 그는 아내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강씨가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결혼하자고 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군요.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처지였는데….” 처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나온 부인과 동거를 시작하면서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입은 옷 그대로 숟가락 하나만 갖고 여관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이씨 부부는 막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근근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씨는 시장에서 묵을 파는 부부를 봤다. “몇 시간 동안 지켜봤더니 장사가 꽤 잘 되더군요. ‘바로 이거다’생각하고 묵 장사를 시작했습니다.”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양복을 입고 머리에는 무스를 바른 채 묵 장사에 나섰다. 마케팅 전략으로 묵에 재미난 이름을 붙여 팔았다. 하루 50만원씩 벌어들이면서 1년 반만에 5,000만원의 빚을 다 갚고 본격적으로 묵 사업에 뛰어들었다. “허리를 다쳐 트럭 노점상을 그만두게 됐죠. 할 수 없이 노점상에게 묵을 대주는 중간 유통상을 시작했습니다.”결혼 3년 만에 이씨는 처갓집에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양복입고 머리에 무스 바르고 묵 팔아 중간 유통상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 왔다. 유통업이 잘 되자 묵을 대주던 제조업자가 본인이 직접 회사를 차린 것이다. 이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든다. 직접 묵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씨는 전국의 묵집이란 묵집은 다 돌아다니며 비교 검토해 강원도 화천에 묵 공장을 세웠다. 직접 여러 가지 묵을 개발한 이씨는 새로운 판매처도 개척한다.“거래처를 개발하려 백화점에 갔는데 처음엔 쳐다 보지도 않더군요. 1년 가까이 끈질기게 따라 다닌 후 입점할 수 있었습니다.”이씨의‘묵’은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기존의 유명 메이커 제품이 하루 10만원 가량의 매상을 기록하는 데 비해 이씨의 제품은 하루 100만원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이씨는 다른 유명 백화점에도 납품을 할 수 있었고 모정식품은‘묵’판매 1위를 기록하게 됐다. 이씨는 지금 3개의 공장을 거느리면서 40억원의 연매출을 올리는 명실상부한 사장이 됐다. 열정을 중시하는 그는 록 그룹 출신들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등 기업문화도 독특하게 가꾸어 나가고 있다. 회사 한쪽에 록 그룹을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 정도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이씨는 조암면 시우리에 대지 1,200평, 건평 200평 규모의 묵 요리 전문음식점도 열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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