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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 대한 10부작 다큐멘터리로 기록필름과 관련 인사들의 증언, 숨겨졌던 진실등을 보여주는 방송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625에 대해서 다시금 돌이보게 되고, 과연 이 전쟁이 왜 일어났나라는 의미보다, 이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극소수 몇명의 결정으로 수십, 수백만명이 죽어나가고, 머나먼 외국에 파병을 나와서 죽어간 수많은 외국인들..
그들이 죽어간 이유가 자유민주주의 수호나,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서 싸운것인지, 그저 해야만했고, 우리와 자신이 죽지 않기위해서 상대를 죽여야만 했던것은 아닌지 하는 아픔이 느껴진다.
어째꺼나 이런 방송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이 땅에 이러한 아픔과 고통은 다시 없었으면 할뿐이다.
꽤 충격적인 사실들도 방송중에 나오는데, 미국이 수세에 몰리자 전쟁에서 빠지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알았지만, 인해전술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후퇴를 거듭하고, 피해가 크자 완전히 전쟁을 포기하고, 남한주민 30여만명을 뉴질랜드의 서사모아라는 섬에 정착시키려는 계획도 있었다고...-_-;;
프로그램 홈페이지 - http://www.kbs.co.kr/1tv/sisa/war/program/index.html
1. 분단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美蘇 국제적 세력분할 구도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지어지는가.
희망의 20세기. 그러나 전쟁의 20세기.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세력 분할의 장이 된다. 스스로 제 운명을 결정할 힘을 가지지 못했던 한반도에 불어온 미소대결이라는 국제양상은 한반도를 역사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는다.
긴장이 흐르는 미국과 소련의 점령경계선. 38선. 소련은 일제강점기에도 자유로웠던 한국인의 남북간 통행을 차단했다.
1945년 겨울. 미국은 한반도에 4개국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 수립을 염원하던 한반도는 큰 충격을 받는다. 토지개혁 등 체제정비에 박차를 가하던 북과 탁치 논쟁에 이어진 대규모 반탁운동에 휘말린 남. 유혈사태로 번진 38선 이남의 좌우대립과 격렬한 갈등. 1946년, 미군정이던 남한 내의 좌익세력은 이미 크게 공격받고 있었다.
주요 인터뷰
박갑동 (前 남로당 박헌영 비서)
백선엽 (前 육군참모총장)
정상진 (前 북한 문화성부상)
리차드 알렌 (前 백악관 안보보좌관)
2. 전쟁의 시그널
서울을 수도로 한 두 개의 정부 수립.
38선을 두고 마주한 남과 북,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1949년, 38선에선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소군의 철수로 남북의 대결 무대가 된 38선. 1949년부터 1년 반 동안 38선 부근에선 무려 750건이 넘는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의 신호였다.
1950년 1월, 북한, 소련, 중국의 공산주의 삼각동맹이 형성됐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과 함께 은밀히 전쟁을 준비한다. 전쟁은 카운트다운만을 남긴 상황. 당시 북한의 남침 정보는 무수히 쏟아졌다. 한국전쟁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정부와 미국은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정부는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분단된 영토와 대립된 이데올로기로 파국으로 치닫는 한반도.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주요 인터뷰
박명림 (연세대학 교수)
박태균 (서울대학 교수)
정병준 (이화여자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교수)
센즈화 (상해화동사범대학 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윌리엄 스툭 (조지아대학 교수)
제임스 퍼슨 (우드로윌슨센터)
3. 폭풍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암호명 '폭풍'. 한국군은 제대로 방어할 새도 없이 무너졌다. 북한의 기습, 미아리 방어선의 붕괴, 한강교 폭파. 6월 28일 새벽 5시, 인민군의 서울 입성. 개전 3일만이었다. 이어진 북한의 공격은 약 1달 만에 경상도의 일부를 제외한 전 남한을 장악했고 1950년 한반도의 여름은 '폭풍'처럼 몰아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인민군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남하할 수 있었는가. 개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전쟁을 대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는 어떠했는가. 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일방적인 후퇴만을 거듭했는가. 국군은 인민군에 어떻게 맞섰는가.
영천 수복과 함께 전쟁의 위기는 한차례 물러가는 듯 했다. 6월 25일 개전부터 치열했던 50년 여름에 대한 역사적 기록. 그러나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요 인터뷰
김재식 (한강교 폭파 지휘관, 전 전남지사)
김종면 (예비역 준장)
김종필 (前 국무총리)
박정인 (前 3 사단장)
오치성 (前 내무장관)
유재흥 (前 국방장관)
이대용 (前 주월공사)
4. 북진
인천방어지구사령부: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13일,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질풍 같은 북진: 38선을 넘느냐 마느냐의 딜레마에서 압록강 점령까지
D-DAY, 1950년 9월 15일.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의 새로운 반전이었다.
인천에 상륙한 UN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13일. 인민군은 강렬하게 저항했고, 이로 인해 UN군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3일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인민군은 남한 내 주요 병력을 철수하고 주요 인사들을 비롯한 각종 서적과 문서들을 북으로 이송시켰다.
9월 28일 처음의 전선을 회복한 UN군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의 북진 결정과 함께 UN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서울을 잃은 지 불과 넉달 만에 평양에 입성한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한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북한으로 행정권을 확대한다는 입장이었지만, 38선 이북지역은 군정을 해야 한다는 UN의 입장은 강경했다. UN군과 국군의 입장 차이로 생겨난 행정의 공백에서 북한 주민들은 갖가지 혼란 속에 방치됐다.
질풍 같은 진격이었다. 압록강을 점령하고 만주 땅을 바라보며 승리의 감격에 도취되어 있던 UN군과 국군.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시 38선에 선 UN군과 국군이 압록강까지 숨가쁘게 몰아쳤던 북진 시기의 전쟁 양상을 살펴본다.
주요 인터뷰
공병식 (前 해병대 사령관)
유재흥 (前 국방장관)
이대용 (前 주월공사)
스탠리 와인롭 (펜실베니아대학 교수)
워렌 위드한 (미 해병 예비역 대령)
5. 후퇴
미국은 중국의 참전을 예상했나: 맥아더와 트루먼의 웨이크회담
소련은 왜 참전 사실을 은폐하려 했는가
한국전 당시 핵무기 투하에 관한 미극동사령부 문서가 존재한다!
10월 19일. 중국군이 드디어 압록강을 넘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결정으로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위협을 느낀 중국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뒤이은 소련 공군의 비밀스러운 참전. 중국군은 UN군이 이제껏 싸워왔던 적과는 전혀 다른 군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은 결국 원폭투하라는 극단적 처방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이제 더 이상 한국전쟁은 한반도 남북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동족상잔의 국내 전쟁에서 동서 진영의 여러 국가가 참전한 국제전으로 완벽하게 변모해갔다. 수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
19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며 전선은 고착화됐다. 중국군의 병력과 UN군의 대규모 화력전은 어느 쪽도 상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더 이상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어느 일방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주요 인터뷰
백남권 (예비역 소장)
백 선엽 (前 육군참모총장)
머레이 케이어 (미 10군단 소령)
센즈화 (상해화동사범대학 교수)
아라 다카시 (나가노 단키대학 교수)
아카기 간지 (게이오대학 교수)
예브기니 바자노프 (러시아 국립외교아카데미 부원장)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
주지안롱 (가쿠슈인대학 교수)
6. 또다른 전쟁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협상,
그러나 전쟁의 망령은 끈질겼다.
휴 전협상은
승리의 명분을 찾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었다.
1951년 6월, 전쟁이 시작된 지 꼭 1년 만에 유엔군과 공산군은 38선 부근에서 다시 만났다. 양측은 더 이상 무력으로는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휴전협상의 신호였다. 협상이 시작되기만 하면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포로 협상은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로 떠올랐다. 전쟁은 수많은 포로들을 배출했고, 그들의 처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먼저, 공산측은 전원송환을 주장했고 유엔 측은 포로들의 자유의사에 따르자는 자유송환으로 맞섰다. 군사적 승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도덕적 승리는 체제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편 거제도에서는 포로수용소장이 친공 포로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포로들의 포로가 된 사건. 이 사건으로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포로수용소는 순식간에 친공 포로와 유엔군의 전장으로 변했다.
유엔 측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북한에 대규모의 폭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포로송환 방법을 둘러싸고 양측은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 했다. 1952년 10월 8일, 유엔 측은 무기한 휴회를 선언했다. 휴전회담은 또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주요 인터뷰
백선엽 (前 육군참모총장, 휴전협상 초대 한국대표)
이상조 (휴전협상 공산측 대표)
알레이 버크 (휴전협상 UN측 대표)
7. 전쟁의 그늘
전쟁은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부 모 사랑 듬뿍 받던 아이가 고아가 되었고
농사를 천직이라 여기던 농부는 좌판 상인이 되었다.
피부색이 검고, 흰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남한 정부의 임시수도, 부산.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밀려드는 피난민들로, 47만이던 부산인구가 순식간에 100만으로 늘어났다. 당시엔 갖춰진 집을 가진 사람보다 시레이션 상자로 만든 임시 집을 가진 사람이 더 많았다. 집이 없는 설움보다 더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종교단체에서 식량을 배급할 때면 으레 아귀다툼이 일어났다. 내가 먼저 살고 볼 일이었다. 굶는 날이 많아지자, 미군부대 음식쓰레기로 끓인 꿀꿀이죽도 먹을 만 했다. 사람들은 점차 피난살이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오랜 피난살이는 고달팠다. 그러나 배움터에서만큼은 늘 웃음이 가득했다. 산, 개천, 묘지, 약탈당한 건물 안, 남녘땅 어디를 가든 그곳엔 학교가 있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당할 수 있지만, 학력은 사라지지 않는 재산이었다. 교육은 한 줄기 희망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을 살게 했다.
8. 정전
2년 여 동안의 휴전협상,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서야 전쟁은 끝이 났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했다.
휴전을 서두르지 말라고 지시하던 공산권 최고 통치자의 죽음. 중국과 북한은 이제 그만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공산 측이 먼저 움직였다. 겨우내 교착상태였던 휴전회담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치열하게 대립한 포로협상. 포로협상은 무려 18개월 동안 계속됐다. 결국 포로송환방법은 포로들의 의사에 따른 자유송환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포로협상 과정에서 배제된 ‘또 다른 포로들(한국군 포로, 신 빨치산)’이 미제로 남게 됐다.
1953년 7월 27일, 전 전선에서 포성이 멈췄다. 미국, 북한, 중국 대표들이 휴전협정문에 서명했다. 그러나 전쟁 당사국인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끝내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1년 4개월을 끈 포로협상.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미국에 의해 계획됐으나 불발된 에버레디 계획(이승만 제거 계획). 남과 북 어느 쪽으로도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제 3국행을 택한 88명의 포로들. 그리고 북한에 억류돼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 한 약 5만 여명의 한국군 포로들의 삶을 통해 휴전협정 조인까지의 과정을 조명해본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정전이 온전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9. 끝나지 않은 전쟁
남북 간의 충돌에서 시작해, 미소 대리전의 양상으로 전개됐던 한국전쟁,
1953년의 휴전은 완전한 평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지금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 워진 이 땅에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마침내 한국전쟁은 끝났다. 남과 북은 저마다 자기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방직후 38선으로 분단됐던 한반도는 그 이름만 휴전선으로 바뀐 채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겨졌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결말이었다.
경제 . 사회 . 문화등 모든 측면에서 개방화의 길을 선택한 남한과 폐쇄적인 독자노선을 걸으며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 체제를 형성한 북한, 두 정권은 서로에 대한 강한 부정과 대립을 통해 자신들의 정권 안정을 도모한다.
80년대 말 동서냉전이 끝났다. 남북 분단의 근원이자 한국전쟁으로 공고화되었던 냉전 해체의 흐름 속에서 남한은 이른바 북방외교에 성공하며 러시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실현한다. 이어서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함으로써 남북 관계에 대한 변화의 기대가 커진다.
그러나 93년 북한 핵개발 의혹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초강수 속에 한반도는 한국전쟁이후 최대의 위기에 놓인다. 평화와 전쟁을 사이에 두고 위태로운 줄타기가 계속되는 한반도, 한국전쟁 60년을 맞이하는 지금도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주요 인터뷰
고르바초프 (前 러시아 대통령)
최호중 (前 외무장관)
10. 에필로그 반성
전쟁을 경험한 이들의 기억속에서
한국전쟁 은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었나?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전쟁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전쟁이후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총을 들고 전쟁터를 누볐던 청년은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피난길에 부모를 잃고 떠돌던 소녀는 그 또래의 손녀를 가진 할머니가 되었다.
전쟁 세대들의 기억속에서
한국전쟁은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었나?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낯선 이국땅에서 처음 마주친 고지전투의 기억은
파란 눈의 노병의 꿈에서 지금도 ?고 ?기는 악몽으로 되살아난다
살기위해 떠나온 고향땅, 다시는 가볼 수조차 없게 된 그 곳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먹먹해져오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전쟁의 기억들...
그들의 사연들을 통해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6.25전쟁 6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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