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의 장손인 인호형이 큰아버지가 돌아가신후에 장손으로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준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뭐야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참.. 가슴 아픈 내용의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장남으로 살아간다는것이 이런것이구나... 정말 힘들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보다 약간은 구세대이고, 아직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입장이라 약간은 객관적인 입장으로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도 장남이 아닌다... 구구절절 저자의 말에 동감을 하게되고, 슬픔에 공감한다.
인호형도 자신이 장손이라고 티를 내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 술자리에서 우리집안에 성공한 사람은 하나 있어야 겠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산다고 말해준적이 있었다. 그저 내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이였다.
암튼 장남으로 살아가는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불평을 하기보다는 장남으로서의 자격을 거부하지 않고, 축복으로 생각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이 부럽고,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왔고, 나를 키워준것의 팔할은 장남정신이라는 말에 울컥해진다.
나도 내가 가진 장남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당당하도록 좀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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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본 - 감추기
우리 시대 장남이란 고개 숙인 한국 남성의 표상이다. 제사라는 굴레를 아내에게 씌우는 남편으로서, 동생들을 보듬어야 할 능력 없는 큰형으로서, 또 조만간 생계 능력을 상실할 부모를 모셔야 할 큰아들로서 이중삼중, 책무만을 지닌 존재일 뿐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담은 직장에서는 물론 친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존심과 ‘곤조’는 버리지 못하고, 실제로는 눈치와 편법만 늘어가는 비겁한 ‘하류 인생’으로 전락해 버렸다. 특히나 현재 30대의 장남은,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책임의식마저 진즉 소멸되어 버렸다. “나는 왜 장남으로 태어났을까….” 저자는 지천명을 앞두고서야 겨우 이 질문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그 사이 아내가 집을 몇 번 나갔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반백이 되셨으며, 아우들도 하나 둘 가정을 꾸렸다. 저자는 조금씩 장남으로서 역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삶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방황을 겪으면서 장남으로서 강인해지고 지혜로워졌으며, 제법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오랜 세월 저자의 가슴을 막막하게 했던 ‘나는 왜 장남으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와인처럼 숙성되어 ‘우리 시대에는 모두가 장남이어야 한다’는 답을 내린다. 그래서 저자는 ‘나는 장남이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 차례 장남은 전쟁 중 형, 형, 우리 형! PART2 우리 시대 新장남 행복학 장남에게 꼭 필요한 가정경영 노하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장남은 전쟁 중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어 장롱 속에 넣는다. 6시 정각, 어린 시절 빗자루질을 하기 위해 골목길을 나섰던 대신 나는 양복으로 차려 입고 택시를 잡기 위해 집을 나선다. 6시 10분, 사우나탕에 들어가 땀을 빼고 팔굽혀펴기를 한다. 7시 12분, 회사에 도착해 구내 이발관으로 가서 머리를 손질하는 사이에 신문을 읽는다. 7시 20분, 분장실로 가서 분장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방송 준비에 들어간다. 7시 35분, 스탠바이. 7시 45분, 방송에 들어간다. 7시 50분, 방송이 끝나자마자 아내에게 전화한다. “일어났어? 오늘 방송 어땠어?” 가족이기 때문에 대답은 늘 ‘좋았다’이다. ‘어쩌다 너는 이리도 힘들게 살게 되었니? 무엇 때문에….’ 늦은 퇴근길, 뻐근한 뒷목을 들어 올리다 눈이 마주친 별이 이렇게 묻는 듯했다. 방송기자 생활 22년. 결코 게으름 피워 본 적이 없다. 그러는 동안 집에 있는 식구들이 환영할 만한 일은 별로 해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인생의 등불로 생각하셨다. 언제나 믿어주었고, 믿는 만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셨다. 어느 때이든 아우들의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를 찾는다. 장남으로서 나는, 그 부지런하고도 강인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우들에게 나눠줘야 할 책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양복 깃을 추스르면서 골목길을 나서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장자로서 받았던 한없는 사랑과 기대를 아우들한테 대물릴 책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서울에 있는 후기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시험을 봤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합격자 발표 게시판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당황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로 올라가자, 짐을 싸라.” 아버지(초등학교 교사)는 사직서를 던지고 나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재입학 시켰다. 장남인 나와 막내 동생이 부모님을 따라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다른 동생들은 시골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후 아버지의 사업이 줄줄이 실패를 하듯 나의 성적도 곤두박질 쳤다. 우울한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열아홉의 겨울, 나는 대학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마른버짐이 가득한 손으로 나에게 학원 등록금을 쥐어주셨다. “어떡해서든 대학에 가라. 너는 꼭 대학을 마치게 하겠다.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라.”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부모님에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재수 생활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동생들 볼 낯이 없었다. 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 한다면 무슨 낯으로 야단을 치고 독려를 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동생들도 공부를 뒷전에 두기 시작하는 눈치였다. 장남으로서 무언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아버지, 장남이라고 꼭 대학에 들어가란 법 있습니까, 될 놈만 집중적으로 밀어줍시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 당시 형제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맏이가 공장에 다니는 풍경은 흔한 일이었다. 우리 집 형편도 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될 놈만 밀어주자. 이게 내 생각이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형제들은 너나없이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특히 성적이 제일 나빴던 넷째 동생의 비약은 눈부셨다. 그러나 공부를 제일 잘하던 둘째가 대학을 포기하게 됐다. 그 후로 나는 7개월 동안 아버지의 트럭 조수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운전사 한 명이 아버지에게 다가와 반색을 했다. “아무개 선생님 아니십니까!” “누구?” “네, 옥산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께 사사한….”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아버지는 중국집에서 장남이 보는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너는 절대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운전 면허증은 따지 마라!” 나는 더는 자장면이 먹고 싶지 않았다.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 해 겨울, 나는 4년제 야간대학에 합격했다. 1975년도였다. 장남이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모든 수모와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두 눈 똑똑히 보고 자라는 것이 장남이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군에 입대했다. 곧이어 아버지가 혈압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족들은 모두 장남의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 후 나는 외무고시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아래 동생과 어머니는 애원에 가까운 표정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우리가 어떻게든 형 등록금을 마련해 볼 테니까 어서 졸업을 해서 취직을 해.” 그렇지, 나는 장남이었다. 그 날로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리고 방송사에 입사시험을 보게 되었다. “자네는 야간대학을 나왔구먼.” 당시 이웅희 사장과 1:1 면접을 했다. “근데 방송국에는 어쩐 일로 응시했지?” “먹고살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 저는 장남으로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다행스레 결과는 합격이었다. 아버지가 제일 기뻐하셨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이제 병원도 다니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 장남이란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거구나.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뿌듯했다. 컬러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사 기자란 직업이 대우받는 세상이 오고 있었다. 나의 직업은 집안의 체면을 세우는 장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결혼을 해야하지 않겠니? 아버지도 그렇고 네가 먼저 결혼을 해야 동생들도 어떻게 해보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저 같은 장남에게 누가 시집오려고 하겠어요? 자신이 없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되실 지 모르는데, 손자라도 얼른 안겨드리는 것이 장남의 도리 아니겠느냐는 말씀에는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 산악인에게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나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 집은 방 세 개 짜리 2층 독채를 전세 내어 이사를 갔다. 한 동안은 장남으로서 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말로만 듣던 ‘고부간의 갈등’에 직면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수발을 두고 어머니가 집사람을 크게 나무라는 일이 생겼고 마음 여렸던 아내는 편지를 써 놓고 그만 집을 나가버렸다. 다음날 처가로 간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집사람을 잘 좀 보살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호통을 치셨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와서 지 마누라 편만 들어! 집을 나갔으면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가르쳐야지!” 아내와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안방까지 끌려갔다. 아, 나는 무능한 장남이구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방바닥에 박았다. “잘못했습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리고 장남이나 맏며느리 역할에 노하우가 붙다 보면 저도 모르게 하늘이 내린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는 것을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내나 나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첫 손자를 안아본 기쁨도 잠시,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늦은 밤, 동생들을 불러모았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는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아버지의 육성을 듣기 위해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네 명의 아우들은 연신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왜 지금껏 아버지한테 잘해드리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골목에 절뚝거리며 다니실 때, 왜 나와 계시냐고 후레자식처럼 소리를 꽥꽥 질렀던 일…. 내가 보아왔던 아버지의 반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머니는 장남인 내게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리게 했다. 1992년, 막내가 결혼식을 올렸다. 이어서 다음해 있었던 넷째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가장 먼저 세상 구경을 나온 장남은 동생들의 본보기이고, 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장남은 특히 매사 일 처리할 때 공평하게 해야 한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형제간의 우애가 깨지는 것은 분배가 화근이 되니까. 그런 것 때문에 틈이 갈라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네, 아버지.” “마지막으로 당부하겠다. 장남은 동생에게는 물론 남들에게도 관대해야 한다. 관대한 것은 용서를 잘 한다는 말이다. 그들을 탓하지 말고 모든 것을 네 잘못으로 돌려라. 절대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고 짧게 말해라. 성실할 것이며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신뢰를 잃게 되면 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매장이 된다.” 장남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이런 훈계를 듣는다. 언제 어느 때라도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CEO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단련 되는 것이다. “무슨 제사상이 이렇게 빈약하냐? 저희 새끼 옷 사주는 것은 아끼지 않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냐! 누가 볼까 부끄럽다.” 제사상을 보시면서 어머니는 끌끌 혀를 찼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들 보기에도 면구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형을 책하던 동생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참으면 가정이 편하지’ 싶어 말을 삼키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할말이 없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다음에는 잘 차리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간은 제사를 올리면서도 꺼이꺼이, 잿밥을 먹으면서도 꺼이꺼이 울던 나였다. 사람의 일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나지 못해 제사상 가지고 질책 받는 장남이 되다니…. 제사가 끝나자마자 동생들이 한마디하고 나섰다. 시골에 있는 땅 문제였다. 손바닥만한 밭을 어머니는 장남인 나와 둘째에게 각각 명의를 상속해줬다. 이 소식을 들은 셋째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순간, 나는 술잔을 동생들에게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우리 형제들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부아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진정하고 말했다. “정 원한다면 내가 포기하마. 네가 그것을 가져도 좋다!” 이런 일을 예상했는지, 아버지는 나에게 단단히 이르셨던 바였다. “형제간에 법의 도움을 받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그 순간 형제간 신의는 깨어진다.” 그래서 장남의 역할이란 것이 중요하다. 저 혼자만 잘 살겠다는 심보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리고, 사람으로서의 예를 갖추게 하는 것, 그러면서 집안의 위신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온 가족이 조화와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남이 할 일이다. 형, 형, 우리 형! 어린 나이에 형으로서 느껴야 했던 또 하나의 책무는 옷을 늘 깔끔하게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내 옷은 다시 동생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형이 곱게 입어서 새 옷이나 진배없다. 이제 네 몸에 맞으니 둘째가 입어라.” 옷의 대물림은 이상한 결과를 안겨준다. 부모님이 사준 옷인데, 동생들이 마치 형이 사주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형아, 고마워! 형아 옷, 내 것 됐다.” 하지만 옷을 동생에게 물릴 때면, 괜히 소중한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양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 내 옷을 왜 동생에게 주는 거야?” 그럴 때면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보다 철이 덜 들어도 한참을 덜 들었구나’고 꾸지람을 하셨다. 넷째 동생의 입가에 있는 흉터가 떠오른다. 내가 분을 참지 못해 던진 숟가락이 동생의 얼굴에 맞았고, 입가가 찢어지고 만 것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돕겠다며 신문배달에 나섰다. 어느 날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와 방에서 먹고 있었다. 때마침 둘째 동생이 들어왔다. 가방에서 야구글러브를 꺼내는 둘째를 보고는 한마디 했다. “집안도 어려운데 야구를 해서 뭐하냐. 야구하면 돈도 많이 든다던데. 꼭 해야겠어?” “엄마도 해 보라고 했는데, 형이 왜 그래? 나는 할거야!” 말끝마다 반항을 하는 동생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야, 이 새끼야!’ 하면서 동생을 향해 던졌다. 순간, 넷째 동생이 울어 제쳤다. 넷째 동생의 입술에 숟가락이 튀어 날아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상처보다 형제들이 서로 싸웠다는 사실에 크게 낙심하셨다. 둘째 동생에게 사과한 것은 한참 뒤 어른이 되어서의 일이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형, 무슨 소리야. 난 다 잊어버렸어. 다 우리 잘 되라고 그런 것인데 뭘 그런 걸 기억해 내고 그래!” 몸의 상처는 날이 가면 쉽게 아문다. 하지만 형제간의 앙칼진 말이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형제이기 때문에 더 아프고 오래 간다. 그러나 아무리 아프더라도 도려낼 것은 꼭 도려내야 한다. 어쩌다 머뭇거려 시간이 흘러도 형제간의 앙금은 꼭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슴을 치는 한으로 남기 전에 말이다. 용서 청하기를 두려워 할 일도 없다. 용서를 빌면 용서가 되고, 화해를 청하면 화해가 되는 것이 바로 형제이다. 낯선 사람을 만나 통성명을 하다 보면 서로 장남이란 사실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왠지 가슴 찡한 정 같은 게 느껴진다. 지난해에 만난 B씨가 그랬다. 서로 장남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죽마고우처럼 마음이 맞았는데 의외인 것은 그 집은 동생이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이었다. “외국 살다 왔어요?” B씨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동생에게 부모님을 모시라고 집을 한 채 사주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워낙 어머니와 뜻이 안 맞아서요….” 그는 말을 이었다. “사실 장남이 제사를 지내고 안 지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남의 책임이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저희들은 형이 모든 책임을 떠맡아 형제간에 의를 상하느니 좀더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쪽입니다. 물론 이렇다 해도 형으로서 감수할 부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장남으로서 정말 어디 하소연도 못하고, 울고 싶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그런데도 옆에서 동생들이 ‘형, 힘들지?’ 그렇게 한마디만 해줘도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게 장남 아닙니까.” 형들도 때론 자신의 짐을 나누어 갖고 싶어진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장남도 가끔은 울고 싶은 법이다. 60년대, 삼형제가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어 형은 죽고 동생들은 살아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형은 동생과 자신의 몸을 묶고 서로 놓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형은 동생과 함께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몸을 싸자, 서로 안고 있으면 덜 춥다! 졸면 죽어, 자지 마!” 이튿날 아침, 수색대는 잠들어 있는 동생을 꼭 싸안은 채 꽁꽁 얼어버린 싸늘한 형을 발견했다. 동네 사람들은 형을 추도하는 묘비를 세웠다. 아우 사랑이 유별난 형의 이야기일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절박한 상황에서 나만 살겠다고 동생을 등지는 형은 없다. 형들이 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란 동생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잘나지 못한 형이라도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에게 언제나 ‘내 편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남에게 꼭 필요한 가정 경영 노하우 내 인생은 ‘장남이라서 불행하다’고 여겼던 시기와 ‘장남이라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나이가 들고 철이 들수록 후자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 이 둘의 차이는 바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륜의 차이인 것 같다. 혈기왕성하여 세상에 풀 길 없는 야망을 품었을 때 장남이란 자리는 나에게 족쇄이고 고뇌였다. 하지만 경륜을 쌓아가며 사람 사는 이치를 깨닫고부터는 장남이란 역할에 묘한 자부심과 즐거움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한 장남’이 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크고 작은 집안의 분란을 겪다 보니, 장남을 위한 교과서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다. 장남은 기업의 CEO와 같은 존재이다. 차이가 있다면, 기업의 CEO가 이윤을 쫓아가는 대신 장남은 가족들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리더가 경영을 잘하면 기업의 주식이 올라가듯, 장남이 제대로 처신하면 가족들의 행복지수는 배가 된다. 성공적인 가정 경영을 위해 장남이 기억해야 할 원칙이란 아주 간단하다. 작은 관심과 사랑을 몸소, 그리고 항상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남의 노력은 가족 간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을 간단히 잠재우며 ‘감동’이라는 즐거운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형제간에도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정이 돈독해진다. 자주 만나는 일이 여의치 않다면 전화라도 자주 할 일이다. 동생들이 먼저 해주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큰형이다, 잘 있지?” 그런데 대부분의 동생들은 형이 전화를 하면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는지 의아해 한다. ‘그냥 걸었어!’라고 하면 무슨 걱정거리나 사고가 생긴 것은 아닌지 지레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남은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 때 꼭 그럴싸한 핑계거리나 스토리를 하나쯤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한다. 꿈자리를 이야기한다든지, 지나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든지 하면 동생들은 긴장에서 안정 톤으로 바뀐다. “그냥 지나가기가 서운하니까 전화한 거야. 별일 없지?” 짧은 통화이지만, 동생의 안부를 묻는 형의 마음 씀씀이에 동생은 감동할 것이다. 형제간의 안부전화를 챙길 때 꼭 피해야 할 대사가 있다. 바로 ‘시간 나면 식사 한번 하자’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남들에게나 하는 덤덤한 소리이다. 형제는 아무리 바빠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무슨 날이 되고 목적이 있어야 만나는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 형제간의 우애란 하루아침에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다. 모두 형이 나서서 챙길 일이다. 귀찮고 피곤할 것 같지만,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이렇게 동기간의 안부전화는 전화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세상 어딘가에 나를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으로 끊고 나면 가슴 뻐근하게 된다. 장남이라면 처가에 특히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철마다 돌아오는 제사에, 동생들 뒤치다꺼리 등, 맏며느리의 역할이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는 장남이라면 처가 관리에 만전을 기울여야 한다. 특별한 날에만 찾아뵐 것이 아니라, 처가에 자주 전화하고 또 자주 찾아뵈어야 한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그리고 과일 한 봉지를 내민다. 그리고 흰 봉투를 덧붙일 일이다. 용돈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집사람에게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지나가다가 장모님 생각나서 들린 것이니까요.” “정말 고맙네, 꼭 약속 지킴세!”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윤 서방이 언제 지나가다 들리면서 용돈을 주고 가더라. 그냥 알고만 있어라.” 친정어머니의 한마디에 아내의 마음에는 갑자기 남편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나는 장남을 둘러싼 고부갈등이나 가정불화는 모두 장남 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집을 살펴보면, 그 아들 역시 자신의 부모를 존중하지 않는다. 생전 처갓집에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아내에게만 헌신과 희생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인면수심의 노릇인 것이다. 아내와의 갈등은 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볼 일이다. 맏며느리로서 아내의 됨됨이를 탓하기 전에 장남은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보편적인 공식은 아내를 통하는 것이다. 문제는 부모님들이 얼마만큼 기꺼워하실 것이냐 하는 부분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동이체를 해두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신경 쓴다면 장남인 본인 명의의 통장으로 자동 이체하여 당신 아들의 이름이 부모님의 통장에 찍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기적인 용돈 이외에 비정기적인 보너스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너스는 아내의 제안이 없는 한은 반드시 장남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한다. 아내 몰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에는 우선,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꿔 봉투에 넣는다. 또 다른 방법은 지갑의 모든 내용물을 빼고 그 안에 새 돈을 넣고 지갑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다. 손때가 묻은 자식의 낡은 지갑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용돈을 보면서 감동을 하지 않을 부모님은 없다. 부모님의 용돈은 반드시 챙겨라. 많으나 적으나. 어른이나 아니나 자식들이 반성해야 할 행동 중의 하나는 부모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특히 삼가야 한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연로하신 부모님은 자식의 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상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손맛을 보고 싶다고 이거 해내라 저거 해내라, 음식 타령을 하는 것도 눈치껏 해야 한다. 나 역시 이런 행동을 했는데, 어느 날인가 음식을 마련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부모님을 조르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돈’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 것은 다 큰 자식이 할 일이 아니다. 자식이 어리석은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건재하신 것 자체가 자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조를 일이 있다면 그건 딱 하나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장남의 입장에서 아내와의 애정을 갈등 없이 가꾸기란 쉽지 않다. 부부관계를 윤택하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아내의 말을 무조건 경청하는 것이다. 단 세 가지 사항은 꼭 지켜야 한다. 첫째는 많든 적든 아내의 불만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들은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내 뱉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불만에 대해 뭔가 반박하고 싶다 해도 반드시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36계를 쓸 일이다. 무조건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마디라도 대꾸를 하다가는 밤낮으로 싸우다가 끝내 파경을 면치 못할 수 있다. 그러니 아내와는 절대로 ‘맞짱’을 뜰 생각을 하지 마라. 나는 장남의 아내가 한 가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단순히 제사를 지내거나 부모님을 모시는 등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장남이 집안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장남의 생각과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아내’, 즉 집안의 맏며느리이다. 다시 말해, 맏며느리란 한 집안의 가치관과 신념, 가족들의 삶의 태도에 직·간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란 얘기이다. 그래서 배필을 고르고자 한다면, 좋은 학벌보다는 불우이웃 돕기 계좌를 하나라도 갖고 있는 여성, 외모보다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여성을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형수님, 우리 형수님!” “언니, 언니, 우리 언니!” 장남의 아내라면 형제들이 언제나 이렇게 정겹게 부를 수 있어야 한다. “형수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이런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 집안의 분란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남은 자기 욕심만으로 여성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믿어주는 여성을 우선순위로 삼을 일이다. 여자의 외모나 학력 등 자신의 욕심에 맞추기보다는 집 안에 잘 맞는 사람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혼을 마음먹기 전에 상대 여성에게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솔직히 밝혀야 한다. 다행히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이라면 함께 살아 볼 용기를 내어도 좋을 일이다. 리더의 성향에 따라 기업의 분위기가 다르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장남이 어떤 표정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집안 전체의 분위기가 좌우된다. 때문에 장남이라면, 가족 모임 등 동생들이나 친척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최대한 표정 관리에 힘써야 한다. 몇 해 전 한식날, 고향으로 가고 있었다. 도로는 호남고속도로에 이르자 완전히 주차장 꼴이 되었다. 식구들은 내 눈치를 슬쩍슬쩍 보기 시작했다. 늘 귀향길에서 내가 먼저 짜증을 내어 분위기를 망쳐놓았기 때문이었다. “형, 길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올해는 짜증 좀 내지마!” 운전대를 잡은 셋째 동생이 미리 내게 예포를 쏘아붙였다. 나는 ‘알았어, 운전이나 조심해!’라고 대답했지만 자기 버릇 뭐 못 준다고 속은 여전히 답답했다. 하지만 마음은 꾹 눌렀다. 얼른 마음을 다 잡고, 식구들과 함께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나가기로 작정하고 궁리했다. 조카들에게 용돈을 미끼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노래가 끝나자, 흥을 돋우기 위해 직접 개그맨 흉내를 내기도 했다. 차 안에 있던 동생들, 제수, 조카들이 안 하던 짓을 하는 나를 보고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도로 정체로 침울했던 분위기는 일순 화목한 분위기가 되었다. 휴게실에서도, 벌초 작업 중에도 그러한 행복감은 이어졌으며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가족들의 마음은 가볍고 즐거웠다. 그날 이후 장남의 마음가짐 하나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 실감했다. 나는 운전 면허증이 없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는 운전 면허증을 따지 않았다. 이런 나의 고집 탓에 고생을 하는 것은 동생들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동생들이 기사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일절의 기름값과 통행료, 간식 및 식사비는 모두 내 몫이다. 이러한 비용 외에도, 장남인 나는 큰어머니께 드리기 위해서 흰 봉투를 준비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많지 않은 용돈을 큰어머니에게 드리는 동안 동생들은 늘 저만치 비켜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집에서나 가족 모임을 꾸리면, 지출의 50% 이상은 장남의 몫이다. 장남의 경제적인 능력과는 큰 상관이 없다. 결국에는 좋은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나는 큰 형이다. 아우들이 내가 사주는 밥 아니면 누구의 밥을 맘 편하게 먹겠는가!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절반만이라도 동생들에게 베풀자.’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이러한 행동은 집안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이어졌다. 집안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제일 먼저 계산대로 뛰어가는 것이다. 사실 내 최면술은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온 것이기에 효과가 그리 큰 것일지도 모른다. “마흔 살이 넘어서 남의 밥을 얻어먹고 다니면 안 된다. 마흔 살이 넘어서부터는 남을 위해 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얻어먹었으면 그만큼 응대하고, 가능하다면 무조건 보시하는 것이다. 그래야 집안이 복을 받는다.” 장남이 지갑을 벌려야 사소한 시비에 휘말릴 염려도 줄어든다. 형제의 우애를 상하게 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돈 문제가 잘못 얽히면 몇 십 년 우애도 순식간에 원수지간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남은 돈 문제만큼은 확실한 원칙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금전 문제에 관한한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아래의 네 가지 원칙 정도는 확실히 갖고 형제나 가족 간에 공표하도록 한다. 첫째, 빚을 지거나 외상은 되도록 금물이다. 장남이 특히 주의 할 것은 카드 빚이다. 장남이 카드 빚에 빠지면 그 집안은 영원히 회생불가능의 상황에 빠진다. 둘째, 형제간에 돈 거래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돈이 정 필요하다면 아예 줘버리는 것이 낫다. 셋째, 형제간에 빚 보증은 절대 안 된다. 빚 보증을 잘못 서게 되면 집안 전체가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맬 수 있다. 만약 어려움에 처한 형제가 있다면 가족회의를 통해 변제 방법을 마련해봐야 한다. 되도록 당장 갚아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되, 여의치 않다면 ‘알아서 해결하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만일 장남이 처지가 어려워졌을 때 동생들이 도와준다고 하면 주저하지 말일이다. 주겠다는 것은 몽땅 다 받는 것이다. 형이라고 늘 여유 있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 문제에 관한 한 가까운 사이일수록, 솔직담백 하고도 깨끗하게 처리해야 한다. 최근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치렀다. 형제들이 2백만 원씩 모아 천만 원을 만들어 드리고, 선물은 각자 알아서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형제들 몰래 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이번 분담금 부담이 되지?” “솔직히 어려워. 가능하면 빌려 줘, 내가 나중에 갚을게.” “알았어. 하지만 그냥 주는 거다. 이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그 일이 있고 2년이 흘렀다. 형제들끼리 시골 큰 댁에 간 적이 있다. 그 동생이 토방 위에서 열심히 미나리를 베고 있었다. “어머니가 같이 오셨으면 형 혈압에 좋다고 뜯었을 텐데 어머니가 안 오셔서 내가 대신 뜯었어. 가서 데쳐 먹어.” 집에 돌아온 후, 미나리를 다 먹고 난 후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나리 잘 먹었다. 정말 고맙다.” “정말이야?” 그리고 동생은 부끄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형. 지난번에 보내준 돈 정말 고마웠어….” 형제 가운데 유난히 어려운 아우가 있다. 무슨 날이라고 하는 때가 되면 이런 동생들을 한번씩 들여다 볼 일이다. 여건이 되는 대로 통장에 돈을 집어넣어 주도록 하자. 아내도 제수씨도 다른 형제들도 모르게 할 일이다. 나는 동생들이 이사했을 때 찾아가기 전에 반드시 전화를 한다. 이사하며 망가졌거나, 새롭게 구입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이다. 형이 사 주는 살림살이란 동생들에게 대단히 특별한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형의 애정을 새삼 다독일 것이다. “이거 우리형이 사준 거야.” 동생이나 제수 편에서는 집안의 자랑거리가 하나 생기는 셈이다. 그렇게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이 덕분에 동생 내외의 부부싸움에 늘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당신은 마음에 안 들지만, 내가 큰 아주버니 때문에 당신과 사는 줄 알아. 알았지?” 형의 애정도 표현하고, 동생 가정의 평화도 가져오는 1석2조의 처세술이다. 장남은 동생들의 민원이나 고민을 속전속결로 처리해 주어야 한다. 핑계나 이유를 대고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동생들은 형을 원망한다. 언제인가 동생에게서 처가 쪽 사람의 취직을 부탁하는 민원을 받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거절했겠지만, 동생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동분서주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 사실을 바로 동생에게 전했다. 내가 누구를 만났고, 전화를 걸었던 곳은 어디인지, 상대의 반응은 어땠는지 상세하게 말했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형은 동생들의 민원에 모든 과정과 사연을 확실하게 고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 알아보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해야 한다. 동생에게 형은 상황을 불문하고 만능 해결사여야 한다. 장남은 가족들의 비상사태에 대비해 나름대로의 묘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특히 의사와 법조인, 식당 주인 등은 꼭 인맥을 다져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요즘 몸이 안 좋은 거 같다. 큰 병원에 가보려 하는데 너 혹시 아는 데 있냐?” 깍듯한 인사치레로 안면을 익혀왔던 동네 내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장남이라 어머니를 모시고 삽니다. 바쁘시겠지만 저희 어머니 좀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러세요? 걱정 마십시오.” 드디어 어머니의 진찰 순서가 되었다. “윤영무 씨 어머니 되시죠? 아드님한테 전화 받았습니다.” 긴장했던 어머니는 아들이 전화를 걸어 줬다는 소리만으로도 힘이 번쩍 나셨다고 한다. 학맥이나 인맥이 닿지 않는다고 걱정할 일은 없다. 자주 다니는 병원 의사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낯을 익혀두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을 걱정하는 진실된 마음 하나면 어떤 의사와도 친분을 유지할 수 있다. 흔히 사업을 물려받는 것도 장남,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1순위도 장남,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물론 장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만 해도, 장남이 외국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부모님을 모시기에 집이 너무 비좁을 수도 있다. 심한 경우, 며느리와 부모님의 성격이 심하게 안 맞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다른 형제들이 당연히 모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흔쾌히 승낙할 아우란 흔하지 않다. 이럴 때는 타협안을 내놓아야 한다. 부모님의 생활비를 장남이 부담한다든가, 장남 몫의 유산상속분을 포기한다든가 동생들이 이해할 만한 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형제들끼리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부모님 부양에 대한 책임이 한 형제에게만 쏠리는 것을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최소한 명절이나 생신 때 찾아와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형제에게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훈수는 못 두게 해야 한다. 세상이 부러워할 거창한 입신양명으로 가문을 빛낼 자신은 없다. 또, 나는 그럴만한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단지, 장남으로서 욕심을 부린다면 우리 가족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제 하는 일을 귀히 여기고,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나라를 걱정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족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대한민국 장남으로서 나의 책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장남인 나는 일요일 아침 늦잠의 유혹을 이겨낸다. 빗자루를 들고 골목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이웃들과 다정하게 인사한다. 그리고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면 가족들끼리 돈을 걷어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낸다. 대단하지도 않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닌 이렇듯 사소한 행동이란, 실은 대한민국 장남으로서 가문을 빛내고자 하는 나의 소박한 우국충정의 노력인 것이다.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변명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동생과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이유 고하를 막론하고 회초리부터 찾으셨다. “형이 얼마나 못났으면 동생하고 맞붙나. 그러고도 잘했다고 변명거리를 찾을 수 있느냐 말이다. 사람이 변명부터 찾자고 보면 한도 끝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는 세상에 나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오늘 저녁은 굶거라.” 핑계를 댄다고 해서,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킨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형이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으면, 아우들 역시 결국에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 저지르고 만다.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책임부재의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형 노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리더를 둔 탓에 우리 동생들은 숱하게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해왔다. 과오를 책임지지 않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희망이 없다. 아무리 대단한 학벌을 지닌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 앞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란 아무리 뛰어난 면이 있다 하더라도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없었다면 나를 비롯해 우리 동생들이 오늘날과 같은 가정을 꾸리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또한 가족들은 내게 장남으로서의 권위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다면 그만큼 책임감도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직장의 팀장으로서, 팀원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지금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한다면, 다가오는 책임부터 기꺼이 맞이할 일이다. 그렇다면, 장남의 무한한 책임감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바로 부모님과 집안의 기대와 사랑이다. 장남에게 건네는 집안 어른들이나 부모님들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유년의 기억은 장남이 한평생 장남 노릇을 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된다. 사실 책임감을 갖도록 독려하는 것은 특별한 권위나 엄청난 보상이 아니다. 바로 기대와 관심, 칭찬과 같은 소소한 애정표현에서 비롯된다. 장남이 자신이 받았던 사랑과 기대를 가족들에게 베풀 듯, 직장 동료들에게 전한다면 분명 그들은 큰 격려를 받을 것이다. 조직을 이끌어 가는 덕장으로서의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의 분위기가 장남의 큰소리 또는 숨소리에 좌우되듯, 조직의 리더 역시 이를 인식하고 노력해야 한다. 헌신하고 봉사하고, 아우들을 두루 배려하는 큰형의 모습이 조직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등 아주 작은 정성에서 시작된다. 나는 장남이란 타인을 향한 배려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동력임을 주장하고 싶다. 장남이 집안을 일으키고 아우들을 책임진다는 것은 베푸는 삶, 나누는 삶에 대한 철학을 밑으로 전한다는 것이다. 슬쩍슬쩍 속정을 내비치며 아우를 배려하는 형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 이런 게 바로 한국형 리더십의 전형이다. 속담에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다. 형이 동생보다 똑똑하고 잘났다는 뜻이 아니다. 아우들보다 먼저 태어났기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그만큼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집안의 어른들은 어릴 때부터 맏이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여러 가지 일을 시킨다. 그러한 속내에는 장남을 향한 모든 가르침이 훗날 아우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세상살이에 노련한 장남일수록 아우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경영이나 조직관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직이 발전하려면 리더의 경험이 다양해야 한다. 다양하고도 오랜 경험을 가진 장남 같은 리더가 있으면 그 조직은 위기에 대처하며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런 리더는 상황 판단도 정확하게 한다. 형제들 중에 냉혹한 세상살이에 가장 먼저 눈뜨는 것이 장남이다. 그래서 단지 말로만 땜질해서는 가족들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형제들 중 누구보다도 먼저 몸을 던지고, 솔선수범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리더가 몸소 경험하고 체험하고 바닥까지 가보지 않으면 조직은 위기를 결코 헤쳐 나갈 수 없다. 리더는 책상물림으로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집안이라도 장남이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면 그 재산은 어느 날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귀한 아들일수록 고생을 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호된 수련의 과정 없이는 제 몫을 하는 리더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리더라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무엇보다 현장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책임 있는 행동과 소신을 가질 수 있다. 머리와 가슴만 갖고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왜, 꼭 당신이(장남이) 해야 해?” 결혼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아내가 입에 달고 있는 말의 1순위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장남은 억울하다. 좋은 학교를 졸업한 장남이나 배움이 미천한 장남이나, 가진 것이 있거나 없거나 다 비슷하다. 그렇다면 정말 행복한 장남은 없는 걸까? 동생이나 가족에게 인정받으며 즐겁게 살아가는 장남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장남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사람은 바로 장남으로서 자신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장남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인정하고 그 역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장남 노릇을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장남이 죄입니까!’라고 수없이 외쳐봤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부고뿐이었다. 땅을 치며 곡을 하면서 정신이 바짝 났다. 장남은 내 천직이었다. 그걸 버리고서는 어떤 자리에 서 있든 나는 행복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도 마찬가지이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힘들고, 사는 게 고단한 것은 누구나 다 똑같다. 문제는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지혜롭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장남을 운명으로 알고 사명감을 갖고 덤벼들었듯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도 같은 의지를 지녀야 한다. 현재와 같은 경쟁주의, 물질주의의 사회에서는 조직이나 개인이나 사명감이 없으면 버텨낼 수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사명감과 소명의식이다. 사실 장남의 자리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장남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일’이라는 작정이 서고 나면 생각만큼 어렵거나 괴로운 일도 많지 않게 된다. 장남과는 달리 직업이나 직장이란 최소한 자기가 선택한 위치가 아니던가. 단순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아닌 진정한 리더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을 순순하게 인정하고, 아무쪼록 사명감부터 가질 일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이런 다음에야 쓸 수 있는 말이다. 리더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직원들에게 공동운명체 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해관계 이상의 끈끈한 휴머니티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직원들에게 공동운명체의 시각을 심어주는 것은 관리자나 리더가 장남정신을 갖고 직원들을 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직원들의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고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 IT업체의 사장에게 왜 그런 일들까지 직접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단지, 연봉만으로 사람을 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를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는 너를 늘 걱정하고 항상 믿고 있다’는 신뢰감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잘 돌아가는 조직은 신뢰라는 DNA로 운영된다. 이러한 신뢰감이 형제애로 결속될 때 조직의 DNA는 결국 탁월한 우성인자로 진화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4명을 거치면 다 아는 사람’이라는 통계가 있다. 나 역시 아는 사람이 많기로 따지자면 주변에서 손꼽히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맥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연줄이니 뭐니 하는 배경이 아니다. 장남으로서의 몸가짐을 하나에서 열까지 걱정하시며 일러주시던 어머니의 말씀 덕이다. “인사를 잘해라. 인사 하나 잘하면 어디 가서 배는 곯지 않는다. 특히 너는 우리 집안의 장남이다. 네가 인사를 챙기지 않으면 네 어미 애비가 욕먹는다. 하루에 세 번 보면 세 번 인사하고, 네 번 보면 또 네 번 인사해라.” 어머니의 훈육 덕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인사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는 평을 들었다. 인맥은 이렇게 인사만 잘해도 형성되는 것이다. 리더인 사람에게는 인사로 인해 얻는 또 다른 이점이 있다. 인사를 제대로 하다보면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할 수 있다. 리더는 조직 내에서 감정 컨트롤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어려운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사를 제대로 하려면 기분에 상관없이 한결같은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인사를 하는 순간만큼은 붉으락푸르락 했던 마음을 접고 공손해져야 하는 것이다. 감정 조절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리더가 깍듯하게 인사를 생활화하는데, 다른 직원들의 인사성이 나쁠 리 없다. 그러면 조직의 분위기 자체가 밝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인사의 힘이다. 장남으로서 동생들에게 40여 년 동안 ‘형! 우리 형!’이라고 제대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무슨 일이든 늘 앞장섰기 때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장남은 가족이라는 소대를 거느린 소대장과도 같다. 언제나 소대장은 앞장서야 한다. “다 제 탓입니다.” 어린 시절 내가 동생들을 지켜냈던 한마디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나도 부장님 같은 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혹은 ‘나도 선배님 같은 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와 같은 말이다. 처음에는 ‘듬직하다’라는 정도의 칭찬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말의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먹고살기가 힘듭니다. 나에게도 누군가 기대고 의지하고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다. 때론 나도 내 위로 형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늘 파랑새를 쫓는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 늘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동경하고 그리워한다. 모두가 리더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정작 그 자리에 앉혀 놓으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장남이 장남 노릇하지 못하고, 리더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가계는, 조직은 수장 없이 전투를 치르는 군졸들처럼 사기를 잃고 결국에는 전패하고 만다. 장남이나 리더나 제대로 조직을 이끌려면, 위기상황에서 숨지 말고 당당하게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나 리더나 살아남을 수 있다. 강조하건대, 앞에서 한마디 툭 내뱉고 뒤로 숨어 궁시렁거리는 나약한 아우의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면 더 이상 우리 미래에 희망은 없다. 모두들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형이라는 존재가 그립겠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누구나 형 노릇을 해야 하는 그런 시대인 것이다. |
<도서 정보>제 목 :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저 자 : 윤영무
출판사 : 영진출판
출판일 : 2004년 6월
구매처 : 인호형이 아버지에게 준 책
구매일 :
일 독 : 2006/1/20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장남으로서의 운명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축복으로 생각하면서 살자.
그리고 장남으로서 장남답게, 모범을 보이면서 살자.
<미디어 리뷰>
저자: 윤영무 |
1956년 12월 충남 부여 출생으로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같은 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방송학을 전공했다. 1982년 MBC 기자로 들어가 23년째 방송기자로 일하고 있다. 1997년 MBC 뉴스데스크의 '1원의 경제학'으로 한국방송대상 기자상을, 그리고 이듬해 ‘눈높이 뉴스보도’로 한국언론대상을 수상했다. 5형제중의 장남으로 현재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
우리 시대 장남이란 고개 숙인 한국 남성의 표상이다. 제사라는 굴레를 아내에게 씌우는 남편으로서, 동생들을 보듬어야 할 능력 없는 큰형으로서, 또 조만간 생계 능력을 상실할 부모를 모셔야 할 큰아들로서 이중삼중, 책무만을 지닌 존재일 뿐이다.
저자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남이기에 꿈도 접어야 했고, 취직과 결혼도 서둘러야 했으며, 동생들에게는 언제라도 지갑을 열어야 했으며, 아내에게는 늘 스트레스만 주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저자는 지금 행복할까, 불행할까.
49년차 장남인 저자는 ‘행복하다’고 잘라 말한다. 장남이기에 받아야했던 집안의 기대와 부모님의 훈육은 젊은 시절 그를 방황으로 이끌었지만, 덕분에 좀더 지혜로워졌으며 강인해졌다는 것. 장남이었기에 세상사는 이치를 빨리 깨달았으며, 험한 일에도 쉽게 기죽지 않으며, 책임감을 몸에 익혀 사회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는 이러한 장남의 속내를 되짚어, 가족애와 형제애의 의미를 반추하는 한편 우리사회가 기억해야 할 장남정신에 대해 조명한다. 49년차 장남인 저자의 진솔하고도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은 와인세대들에게는 지나온 시절에 대한 향수를, 젊은 세대들에게는 형님이나 아버지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책속으로>
PART 1. 대한민국 장남보고서
에필로그∥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간다는 것
1장. 장남은 전쟁 중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장남은 자라면 서울로
장남을 향한 ?묻지마’투자
아버지와 자장면
장남이 사람노릇을 하려면…
하늘이 낸 맏며느리 찾기 1
하늘이 낸 맏며느리 찾기 2
장남과 그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
결혼보다 어려운 장남의 이혼
아버님의 눈을 감겨드리다
혼주로 선 막내의 결혼식
민법에도 없는 장남의 의무
2장 형, 형, 우리 형!
“얘가 내 동생이야, 건드리면 죽어!”
부모님의 잔소리보다 강력한 형의 한마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형은 원래 포도 싫어하잖아!”
형제간의 다툼은 칼로 물베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장남도 울고 싶다
태극기 휘날리며
PART 2. 우리 시대의 新장남 행복학
3장. 장남에게 꼭 필요한 가정 경영 노하우
가화만사성의 시작은 전화 한 통
처가유친妻家有親하라
부모님께 용돈 드리는 것도 공식이 있다
부모님께 조르지 않는 자식이 되라
가끔은 술의 힘을 빌려라
장남이 지켜야 할 부부관계 규칙
장남이 결혼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들
장남은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
장남은 구둣주걱을 찾지 않는다
경제적인 부담은 계를 조직해 해소한다.
형제간 돈거래 3대 원칙
아우를 도와줄 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하라
제수씨에게 점수를 따라
동생들의 고민은 이유합당하게 해결한다.
동네 의사와 식당 주인은 필히 알아둔다.
장남이 부모님을 꼭 모시지 않아도 좋다.
외동아들 처세법
대한민국 ‘장남정신’이란 이런 것이다
; 가계도家系圖 작성하기
4장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장남의 사전에 '변명'이란 단어는 없다
장남형 리더십이 곧 한국형 리더십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의 참뜻
장남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신뢰'라는 탁월한 DNA 구축하기
연줄에 연연하지 않는 장남형 인맥형성법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아우의식을 버려라
에필로그 ∥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장남정신이다.
용돈을 이렇듯 봉투에 넣어드리는 것 이외에 평소 사용하는 지갑을 이용하는 방법도 추천할 만한 '이벤트'이다. 신분증 등 지갑의 모든 내용물을 빼고 그 안에 미리 준비한 빳빳한 돈을 넣는다. 그리고 지갑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다.
"봉투에 넣어 드려야 하는데, 준비를 못했어요. 그냥 제 지갑에 넣어 드릴게요. 지갑은 나중에 돌려주세요."
생활전선의 손때가 묻은 자식의 낡은 지갑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용돈을 보면서 감동을 하지 않을 부모님은 없다. - 본문 145~146쪽 중에서
우리 사회는 그동안 장남의 부재로 몸살을 앓아왔다. 아무도 장남이 되고 싶어하지 않듯, 조직의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는 없고 리더가 되기 위한 욕망만 판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그만 덜 여문 아우의 모습을 버릴 일이다. 아버지가 없는 시대, 이제는 모두가 장남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뒤로 숨고 변명하며, 남 탓하기 좋아하는 아우의식으로는 더 이상 우리 사회는 미래를 꿈꿀 수 없다. 앞장서고 책임지며 베풀 줄 아는 장남정신을 되새길 때다. - 윤영무
그러던 어느 날, 건너편에 트럭을 세워두었던 운전사 한 명이 성큼성큼 아버지에게 다가와 모자를 벗으며 반색을 했다. "저 아무개 선생님 아니십니까?....!" 순간 아버지는 당황했다......중략....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갛게 물드는 것을. 온몸이 떨리면서 말을 더듬는 것을. 아버지가 그렇게 당황해하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점잖은 교편을 잡던 시골 마을의 유유자적한 선비가 아니었다. 10여 년 만에 만난 제자 앞에서 아버지는 ' 그림자도 밝지 못했던' 과거의 그 말쑥한 양복차림의 선생님이 아니라 허름한 작업복에 털털거리는 트럭을 운전하는 일용직 화물 노동자였던 것이다. (37~38)
나는 지금도 달동네에서 자신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 줄도 모른채 방황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안타깝다. 아무도 그들에게 공부하라! 고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다. 새벽이면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 몸을 눞히기에 바쁜 부모들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그 누구도 미래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꿈을 갖는다는 말의 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 내가 꼭 그랬다. 오늘 벌어 내일 사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이니 집안의 장래이니 하는 말들은 그저 호사가들의 말장난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몸의 상처는 날이 가면 쉽게 아문다. 하지만 형제간의 앙칼진 말이나 가시 돋친 말 한마디는 폐부 깊숙이 박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형제이기 때문에 더 아프고 오래 간다. 그러나 아무리 아프더라도 도려낼 것은 꼭 도려내야 한다. 어쩌다 머뭇거려 시간이 흘러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더라도 형제간의 앙금은 꼭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슴을 치는 한으로 남기 전에 말이다. 용서 청하기를 두려워할 일도 없다. 용서를 빌면 용서가 되고, 화해를 청하면 화해가 되는 것이 바로 형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