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최고다!
많은 통찰력과 그동안 인생경험에 쌓인 그의 지혜가 묻어 나는 책이다...
이런 인생관련부분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밑줄을 쳐보기는 거의 최고인듯하다.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해왔던것.. 내가 오해하고 있던것 등등 많은 점을 찾아냈다...
나도 좀 더 사색하고, 통찰력을 가져야 겠고.. 잘못된점들을 찾았으니 고쳐야겠고.. 앞으로 두고두고 읽게되지 않을까 싶은 책이다!
도서요약본 |
도서요약본 - 감추기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 직전의 사람들을 만나고 쓴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에 관한 기록. 죽음을 앞둔 뒤 인생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 '인생의 스승들'이 전하는 삶의 진실과 교훈이 담겨 있다. ▣ 저자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였고 뉴욕,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았다. 앞장서서 의사와 간호사, 의대생들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켰다. 말기 환자 5백여 명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 써낸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여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학술세미나와 워크숍들로부터 가장 많은 부름을 받는 정신의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많은 학술상을 받은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인생 수업(Life Lessons)』을 마지막 저서로 2004년 8월 24일 눈을 감았다. 데이비드 케슬러 - 미국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생애 마지막 몇 년을 함께 보내며 『인생 수업』과 『슬픔에 대하여(On Grief and Grieving)』를 펴냈다. 데이비드는 마더 테레사가 캘커타에 세운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에서도 봉사하며 호스피스의 역할의 중요성을 경험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첫 번째 저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The Needs of the Dying)』은 마더 테레사의 찬사를 받으며 영국, 중국, 독일, 홍콩, 일본, 네덜란드, 폴란드, 스페인, 남미 등지에서 번역되었다. 현재는 시트리스 밸리 헬스 파트너스 의료원 원장을 맡아 가정 및 병동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 역자 류시화 ▣ Short Summary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위대한 가르침을 주는 인생의 교사들이다. 삶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죽음의 강으로 내몰린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교훈은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해냈다. 두 사람은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해, 그들이 말하는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기록하여 살아 있는 우리에게 강의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강의의 제목은 ‘인생 수업’이다.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이라는 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수업 시간이 하루 24시간인 학교에서 살아 있는 한 그 수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수업은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이다.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인내, 받아들임, 용서, 행복 등이 이 학교의 과목들이다.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있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저자는 우리가 이 지상에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우리가 한 말과 행동이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마지막 말과 행동이 될 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너무 늦어버릴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다. 그들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삶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일하고, 놀이를 하고 별들을 바라볼 기회를 주었으니까.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 거예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은 여인, 삶과 죽음에 관한한 모든 이들의 교사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비록 모든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할지라도, 세상은 그녀로 인해 더 나은 곳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을 바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가슴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시작한 의사이며, 사상가였다. 그녀는 말한다. 인간은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다고. 태양이 밖에 있을 때는 반짝이고 빛이 나지만, 어둠이 드리울 때 스테인드 글라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안의 빛에서 나타난다.
한 남자가 건강이 몹시 안 좋은 자기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을 보내 드리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죠. ‘할머니, 전 할머니를 보내 드릴 수 없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얘야, 난 만족한단다. 내 삶은 멋지고 완벽했어. 더 이상 내 모습이 생기로 가득 차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난 이미 여행에서 많은 것을 누렸어. 삶이란 마치 파이와 같지. 부모님께 한 조각,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조각, 아이들에게 한 조각, 일에 한 조각, 그렇게 한 조각씩 떼어 주다 삶이 끝날 때쯤엔 자신을 위한 파이를 한 조각도 남겨 두지 못한 사람도 있단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어떤 파이였는지조차 모르지. 난 내가 어떤 파이였는지 알고 있단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알아내야 할 몫이지. 난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단다.” 어느 날 갑자기 의사로부터 암 판정을 받거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싸우거나 지진과 해일 같은 재난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종착점에 서 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인생의 문 앞에 서 있기도 합니다. 불행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어느 순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배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망이라는 어둠 속에서 남은 생 동안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이 배움이 모두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더 의미 있게 해준다는 것을 누구나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그 배움을 얻기 위해 꼭 삶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지금 이 순간 그 배움을 얻을 수는 없을까요? 수십 년 동안, 죽음을 앞둔 이들과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을 치료하면서 우리는 인간에게 필요한 배움 들이 결국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두려움, 자기 비난, 화, 용서에 대한 배움입니다. 또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배움, 사랑과 관계에 대한 배움입니다.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난 내 삶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 즐겁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삶의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큰 상실감에 빠졌을 때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고, 간직하고,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밖에서 행복을 찾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그 대신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삶의 의미와 진정한 부를 발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삶의 복잡성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흐르는 단순한 진리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라는 행성 위를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우리들 각자는 외롭고,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실수, 잘못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전에는 그것들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는 오직 ‘그 사람’만이 보일 뿐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더 진실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진정한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시작과 끝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것일까요?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완벽한 조각상이 누군가가 자신을 꺼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있는 위대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위대함의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가장 뛰어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 버렸을 뿐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여러 가지 역할을 맡습니다. 배우자, 부모, 직장 상사, 좋은 사람, 반항아 등. 본래의 자신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들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내려는 최초의 시도를 합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마이클 조던 같은 뛰어난 운동선수도 아니지만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타고난 재능을 눈부시게 꽃피울 수 있습니다. 본래의 당신은 가장 순수한 사람이며 완전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어둠 속에서 당신을 인도하는 불빛과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와 안에 있는 존재가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숨거나 두려워하거나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황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랑, 정의 내리기조차 매우 힘든 이것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깊은 부분이고, 우리 안에 살면서 우리를 연결해주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지식, 학벌,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행위 너머에 있습니다. 또한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산물입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환상과 꿈, 공허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진실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갖게 된 그림입니다. 가장 흔한 그림은 갑자기 누군가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완벽하다고 느끼며, 모든 것이 멋져 보이고,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낭만적인 이상형입니다. 그러다가 현실의 삶에서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한 상황들에 맞닥뜨릴 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크게 상처받습니다. 심지어 가족과 친구 간의 사랑도 각자의 기대와 요구에 좌우되고 있습니다. 기대와 요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현실의 사소한 갈등은 필연적으로 악몽을 만드는 씨앗이 되고, 우리는 결국 사랑 없는 관계 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걸고 있는 기대를 버려야 평화롭고 행복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엄격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사랑에 대한 조건은 관계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그런 조건들에서 벗어난다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사랑이 되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을 일일이 계산한다면 결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며, 언제나 손해 본다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재는 행위 자체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당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해결책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가 또는 그녀가 당신의 마음에 들면 어떻고, 또 안 들면 어떻습니까? 어머니, 친구, 형제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건가요? 그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변화를 보게 될 것이고, 갇혀 있던 우주의 모든 힘이 해방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방의 가슴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닫고 편협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전화를 걸지 않는지, 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웃음과 이해,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배신하고 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혼자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움켜쥐는 것은 상대방이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보다 훨씬 더 부당한 것입니다. 신 앞에 서게 되는 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또 받았느냐?”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무한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기회들은 주위 모든 곳에 널려 있고, 우리는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됩니다.
한 여성이 몇 달 전 남편과 함께 보낸, 어느 평범한 저녁 시간을 회상했습니다. 그날 그들 부부는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9시경에 남편은 속이 좋지 않다며 소화제를 먹었습니다. 그러더니 몇 분 후 그는 먼저 자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좀 더 있다가 자겠다며 남았고, 내일 아침에는 속이 괜찮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남편에게 키스해 주었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뒤 그녀가 자러 갔을 때 남편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그녀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난 그냥 느낄 수 있었어요. 옆에 누워 있는 남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걸 말예요. 그는 44세의 나이에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거예요.” 그 가슴 아픈 일을 겪은 후 그녀는 모든 인간관계와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어요.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키스였고, 마지막 저녁식사였으며, 마지막 휴가였고, 마지막 포옹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웃은 시간이었어요. 누구라도 그런 일을 겪기 전까지는 언제가 마지막 외출이 될지, 언제가 마지막 추수감사절이 될지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걸 난 깨달았어요.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에는 마지막이 있다는 것도요. 나는 남편이 내게 잠시 동안 맡겨진 선물일 뿐, 영원히 내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어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걸 깨닫고 나서 지금 이 순간과 사람들을 휠씬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어요.” 전 생애 동안 우리는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배우자나 연인, 친구처럼 우리가 선택해서 맺은 관계도 있고, 부모 형제처럼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관계도 있습니다. 그 관계들을 통해 우리는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기회를 갖습니다. 관계가 곧 큰 배움의 기회라는 말은 언뜻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관계들이 때로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며, 가슴 아픈 경험을 심어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나 가족,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만나는 사람 모두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들은 친구나 친척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선생님, 가게 점원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그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관계이지만, 또 많은 공통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로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서부터 먼 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맺고 있는 각각의 관계들에는 ‘나 자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완전한 삶은 당신 자신안에서부터 나와야만 합니다. 특별한 누군가를 발견한다고 해서 인간관계나 책임감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진정한 해답은 특별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대신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할 누군가를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연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관계란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과의 사사로운 마주침에서조차 우리는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주치는 모든 이들은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행복과 사랑, 또는 고통과 불행으로 인도해 줄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상황들은 마치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이 서로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 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에서 어떤 부분이 달라진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배우자를 바꾸거나 관계를 변화시키면 완벽해지고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상대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바꿀 수 없으며, 바꾸려 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이 절대로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또 그들이 변할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기를 원한다면, 그들도 진정한 그들로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관계는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이 바라는 인물이 아니라고 해서 관계를 ‘깨뜨릴’ 수도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상호작용입니다. 곧, 관계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으며, 그러므로 그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더 좋게 고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나 당신이 중심입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문제에서 어떤 배움을 얻을 것인가가 당신이 할 일입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마지막 작별인사까지, 우리는 관계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관계에 관해 자신이 미리 갖고 있는 기준을 버릴 때, 누구를 얼마나 오래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신에게 선물 받은 위대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이런 한계들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의 학교라면, 상실과 이별은 그 학교의 주요 과목입니다.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필요한 시기에 우리를 보살펴주는 사랑하는 이들의 손길을 자각하기도 합니다. 상실과 이별은 우리의 가슴에 난 구멍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주는 사랑을 담아 둘 수 있는 구멍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언제나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던 우리는 갑자기 땅 위에 홀로 서야 할 순간을 맞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은 이사 등의 이유로 우리 곁을 떠나가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부서지거나 사라지고, 야구 시합에서 패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첫사랑과는 결국 헤어지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이별들은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한 해 한 해 흘러갈수록 우리는 선생님을 잃고, 친구들을 잃고, 어린 시절의 꿈을 잃습니다. 청춘, 꿈, 자유와 같은 무형의 것들도 결국엔 사라지거나 퇴색해갑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주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현실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유권 역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모든 것을 언제까지나 소유하고 있으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리고 상실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허사로 끝납니다. 우리는 삶을 이런 식으로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삶 속에 있는 것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처럼 가정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상실인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놀라운 일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가족들이 환자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도 다가올 죽음을 숨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어야 할 상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죽어가는 이에게 그것을 언급하는 건 더더욱 원치 않습니다. 병원 관계자 또한 아무 말도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다가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근시안적인가요? 게다가 이것이 그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가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잃어가는지 알고 있으며, 그 가치를 이해합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상실 없이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우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상실에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시간이 그 모든 것을 치유하리라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치유의 과정이 언제나 직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자신을 회복해 가다가도 갑자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행하는 것 같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과정입니다. 결국 당신은 치유될 것이며, 온전한 자신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슬퍼한 사람이나 사물이 결코 당신에게 소유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론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한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합니다. 상실로 인해 고통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결국 더 강해지고, 더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머리카락은 조금 빠지지만, 외모 못지 않게 내면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퇴직하면 수입은 없어지지만,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노년에 이르면 자식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베풀었던 사랑을 돌려받습니다. 소유하던 것을 잃은 슬픔이 가시고 나면 자신이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가볍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때로 관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이 아닌, 홀로 있는 자신을 말합니다. 어떤 물건이나 능력을 잃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행동에서 놀라운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마치 “나는 한 때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말하려는 듯이 열심히 자신의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다가 병세가 차츰 악화되고 감정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조차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상실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부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부분, 사랑하는 이들의 진정한 부분을 당신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 정말로 소중한 것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이 느낀 사랑과 당신이 준 사랑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진정한 힘은 사회적 지위나 넉넉한 은행잔고, 번듯한 직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강인한, 그리고 고귀한 내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우주의 근본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힘으로 충만해있고, 자연도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씨앗은 꽃으로 피어나고 날마다 태양은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명이 잉태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이 모든 힘과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이런 힘을 자연에게만 주고 인간은 나약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와 힘을 동등한 것으로 여기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돈을 갖게 되어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면 크게 실망합니다. 가난을 못 이겨 자살하는 사람들만큼 많은 수의 부자들이 자살을 합니다. 부와 행복을 모두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잘 아는 현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경제적으로 힘들어졌을 때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난해진 기분이 어떤가?” 그는 말했습니다. “난 가난해진 게 아니라 재정적으로 파산한 거네. 가난이란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지. 그러니 난 결코 가난하지 않아.” 그의 말이 맞습니다. 부와 가난은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이들이 있는 반면,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부자들도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돈이 바닥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태입니다. 돈이 호주머니를 드나드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언제나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부유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난하게 생각하는 것의 정반대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진정한 부의 출발입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단, 우리가 손에 넣는 어떤 물질보다도 우리 자신이 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돈은 자연히 띠라온다는 충고를 듣습니다. 때로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더 정확한 진실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면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것보다 더 큰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임종의 자리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뉘우칩니다. “난 한 번도 내 꿈을 추구해 본 적이 없어." "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어.” “난 돈의 노예였어.”하고 말입니다. “사무실에 좀더 늦게까지 남아서 일할 걸 그랬어.”라거나 “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훨씬 행복했을거야.”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하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는 외부환경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영향력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신경 쓰면 정작 자신의 힘을 잃어버립니다. 이 힘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은 바로 당신 자신의 삶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힘은 없지만,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힘이 있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당신은 그들의 생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10년 전에 당신이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이미 당신의 삶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혹시 아직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들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중일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이제 잊어버리고, 당신의 힘을 되찾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의견을 만들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내일이 없으므로 더 이상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게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늘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왜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하고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게임을 아무리 훌륭히 치러냈더라도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결국 힘을 잃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게임은 언제나 우리를 결핍 상태에 머물게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더 많이 축적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완전히 잊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힘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너무도 무지합니다. 진정한 힘은 자신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보는 것은 말 그대로 과거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밤의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몇 년 전, 적게는 2, 3년 전에서 많게는 100만년 전의 하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내보내는 빛이 지구에 와 닿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경험하는 것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 알던 이웃집 말썽꾸러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신이 만일 그때 그 아이를 문제아라고 생각했다면 오늘 그를 만나도 약간은 경계할 것입니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과거의 문제아로 그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실제모습보다는 과거나 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 느낀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살지 않으면,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보내버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멋진 경험들을 안겨 주는 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미래만 바라보며 살고, 또 어떤 이는 미래를 꿈꾸며, 또 다른 이는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접근은 현재를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때 지금 이순간 일어나는 이 신성한 공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삶은 시간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살고, 또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시간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안도 변하고 바깥도 변합니다. 우리의 외모도 내면의 자아도 변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대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유방암을 두 차례나 이겨 낸 작가 로니 카예는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라고 말했습니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바로 그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변화에 맞서 싸운다면 평생 싸움만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껴안는 방법,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단계에서는 우리를 지켜 주는 경고 체계 역할을 합니다. 밤늦게 시내의 위험지역을 걸을 때 두려움은 위험가능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위험이 잠재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자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위험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아무런 현실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수시로 찾아와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두려움의 원인이 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대부분은 걱정과 두려움의 전조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죽음을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로막습니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랑, 진실된 감정, 행복, 자기 존재의 확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가로막는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실제로 얼마나 일어날까요?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보험회사 직원들은 우리가 걱정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매년 수백억씩 벌어들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궁극적인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과 마주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깨닫습니다. 죽음이 자신을 파괴하지도 못하며,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리란 것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두려움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만일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꿈을 추구한다면, 당신의 삶은 틀림없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얻는 배움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최악의 두려움과 맞서게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또 다른 삶을 보여 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남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두려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다른 감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감정입니다. 행복, 불안, 기쁨, 분노 등 우리가 평생 겪는 많은 감정들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은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사랑으로부터,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사랑으로부터는 행복, 만족, 평화, 기쁨이, 두려움으로부터는 분노, 미움, 걱정, 그리고 죄의식이 나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 또는 두려움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차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두려움들은 과거나 미래 중 어느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만이 현재의 감정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유일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 뿐이며, 사랑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감정입니다. 현재 일어나는 감정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과거에 일어난 어떤 경험이나 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여겨지는 어떤 일들을 걱정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채울 때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가장 두려운 일들을 대담하게 행할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붙들리지 않고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당신은 삶을 잃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망설임 없이 사랑하고, 솔직하게 마음 속 말을 하고, 자기 방어를 하지 않고도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단 두려움을 뛰어 넘으면 새로운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두려움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두려움이 주는 이런 배움들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경이롭고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우리가 꿈꾸던 삶을.
미드웨스트 병원 응급실에 다섯 사람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한꺼번에 실려왔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다섯 명 모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물이 붕괴되어서? 버스가 충돌해서? 10대 폭력단이 쏜 총에 맞아서? 화재가 일어나서? 아닙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화가 나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황은 이러했습니다. 차 한 대가 시골길에서 앞 차를 추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전자들은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그들은 바로 옆에서 나란히 차를 달리며 서로를 추월하려 했습니다. 맞은편에서 또 다른 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습니다. 서로 앞지르려 한 두 운전자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서로에게 화낼 이유도 없었지만, 단지 앞지르려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습니다. 화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런 감정이며,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밖으로 표현되면 몇 분, 몇 초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새치기를 당하면 우리는 아마 그 사람에게 1분 가량 화를 낼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화를 내고 그것을 표현하면서 잠깐동안 지속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이 작은 화들을 그때 그때 풀어 주지 않으면 그것은 점점 커지다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운전자는 이런저런 화난 일들을 오랫동안 가슴속에 가득 담고 있다가 서로를 만났을 때 그것을 폭발시킨 것입니다. 불과 몇 초만에 그 화는 화산처럼 폭발했습니다. 화를 안으로 삭일 때 그것은 종종 우울증이나 자기 비난으로 표현됩니다. 안으로 억누른 화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꿔 놓으며, 현실을 보는 관점을 왜곡합니다. 우리의 사회가 화내는 일을 나쁘고 잘못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건강하에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화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그것을 마음속에 쑤셔 넣고 부정하거나 그냥 간직한 채 살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한꺼번에 폭발시키고 맙니다. 작은 일에 대해 제대로 화내고 푸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와 어린아이들은 감정을 솔직히 느낀 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울고 난 뒤 잊어버리고, 화를 낸 뒤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죽음의 시기에 이르면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정직해집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난 두려워요.” 또는 “난 화가 나요.” 하고 쉽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더 솔직해지는 법과 화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는 우리 삶에서 스쳐지나가는 감정이어야지, 존재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왜 성공하려고 하는지는 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에 나가더라도 좋은 연줄을 얻기 위한 모임에만 나갈 뿐, 단지 재미를 위한 모임 같은 곳에는 가지 않습니다. 주말은 동료를 따라잡고 승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쩌다 주말에 놀러 나가서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초조한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성공과 권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놀이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놀고, 해방되고,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놀이란 순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는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놀이 상대는 성별, 인종, 종교, 연령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이 아니어도 함께 놀 수 있습니다. 놀이는 내면의 기쁨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노래, 춤, 수영, 등산, 요리, 달리기, 게임 등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놀이는 삶의 모든 측면을 더 의미 있고 즐겁게 만듭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도 더 만족을 느끼게 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놀이는 사람을 젊어지게 하고 긍정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놀이에 시간을 쓸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느냐고 답합니다. 놀이는 삶의 균형을 잡아 주며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잠시 놀고 난 뒤 우리는 일을 더 잘합니다.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놀이를 잊어버립니다. 생산성을 생각하기 이전의, 순수하게 놀이 자체를 즐기던 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세상은 마술같은 일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오래된 느낌을 되살려 조금만 더 즐길 수 있다면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이를 먹어가더라도 마음은 언제나 청춘일 것입니다. 거죽이 늙어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계속 놀이를 한다면 내면은 여전히 젊은 채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알츠하이머 병과 같은 상황은 우리에게 인내와 이해에 대한 큰 배움을 가르쳐 줍니다. 때때로 그 배움은 환자 자신보다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더 의미가 큽니다. 인내는 가장 힘든 배움, 아마도 가장 큰 절망감을 안겨주는 배움일 것입니다. 인내가 배움이 된다는 사실은 싫지만 아플 때는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당신이 만일 지금 아프거나 남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면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서 인내의 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불편함을 안고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장의 결과와 만족을 기대하며, 실제 가능한 것보다 더 빠른 대답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법을 잊어버렸고, 심지어 기다림의 의미조차 알지 못합니다.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좋지만, 만족을 뒤로 미루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내심은 규칙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근육과 같습니다. 날마다 훈련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데 걸리는 1, 2분 같은 작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그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삶의 더 큰 도전들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튼튼한 근육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삶은 경험의 연속이며, 우리 모두는 그 경험들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비록 우리가 보지 못할지라도 모든 경험에는 원인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필요한 배움을 주기 위해 일어납니다. 성급하게 “난 싫어! 바꾸고 싶어!” 하고 소리친다면 그런 배움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때로는 거부하고, 불평하고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대신, 그 상황을 다만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당신을 치유해주고,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삶의 종착점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나쁜 경험조차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로부터 배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겪은 모든 일, 인생의 거센 폭풍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경이로운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나약함의 상징이나 포기, 굴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임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고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위안과 힘을 얻는 일입니다. 받아들이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치병 진단을 받고 나서 양손을 치켜 올리며 “희망이 없어, 난 죽게 될 거야!”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포기입니다. 받아들임은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치료법을 선택해 시도해도 효과가 없을 경우, 우리의 삶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포기란 우리가 가진 생명력을 부인하는 것이고, 받아들임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황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포기이며, 그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은 받아들임입니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은 오른쪽 다리가 감염되어 입원했습니다. 20대의 이 청년은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리절단의 가능성은 그를 인질로 잡고 있는 악마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이 상황을 직시할 수 있게 되면서 그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을지도 몰라. 그러면 난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견뎌 내리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의족을 하게 될 것이고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일단 ’받아들임‘이라는 강의 건너편에 도달하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상황을 평화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병을 치료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다리 치료는 성공적이었고 절단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를 돌아보며 브라이언은 그 끔찍한 상황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결국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였을 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순종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또는 어떤 상황일까요? 매일, 매 순간, 매 상황이 순종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우리보다 더 큰 힘에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법을 잊어버린 탓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바꿔야 하고 당신에게 그것을 바꿀 힘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인정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일을 이루려는 욕망으로 끊임없이 분투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우리 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멋진 선물입니다. 삶을 뒤돌아본다면, 가장 중요한 순간과 멋진 기회들이 반드시 당신이 세워 놓은 계획과 노력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때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우연의 일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임이 일하는 방식이며, 삶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준비하던 인도는 종교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내전 중에 회교도에게 아들을 잃은 한 힌두교도가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회교도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미움이 마음 속에 가득한데, 어떻게 하면 제가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간디는 그 남자에게 고아가 된 적의 아들을 입양해 자식처럼 키우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며,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연결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을 겪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왔습니다. 문제는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없거나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계속 아프게 하는 상처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처들을 쌓으며 살아가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용서가 필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용서는 다시 한번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줍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찾고, 불쾌한 사건을 딛고 더 잘 될 수 있습니다.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을 영원한 피해자로 만드는 일입니다. 용서는 상처를 초월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 때문에 영원히 상처받은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나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어도 스스로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일생에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영적인 정화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사랑과 접촉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한 번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삶속의 어떤 것들은 그것들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그 의미가 변합니다. 중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시한부 인생이었을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대부분 행복을 어떤 사건이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행복은 우리 주위에서 진행되는 일과는 별 관계가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얻거나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완벽하게 행복해 질거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행복이 복권에 당첨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주름을 제거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많이 봐 왔습니다. 다행스런 일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스런 일은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정신, 영혼은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처음부터 프로그램되어 있고, 모든 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올바른 장소에서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인식하고, 그 전체를 어떤 마음 상태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삶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도전으로 이루어진 학교입니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웠을 때, 또한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을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두 살 된 아이를 잃은 부모는 그 아이가 부모에게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에 왔을 수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우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깔려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여기저기 다치고 멍이 들지만 전보다 더 윤이 나고 값지게 됩니다. 당신은 이제 훨씬 더 큰 배움, 더 큰 도전, 더 큰 삶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악몽은 언젠가는 삶의 일부인 축복으로 바뀝니다. 상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소중한지 보여주며, 사랑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줍니다. 두려움, 분노, 죄의식, 인내심, 시간조차도 훌륭한 교사가 됩니다. 삶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생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영혼이 성장할수록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조차도 점점 작아집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삶이 즐겁다면 죽음도 그래야 한다. 그것은 같은 주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삶, 행복, 사랑, 그 이상의 것들을 가져다주는 손은 죽음을 끔찍한 경험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교훈 중 하나는 삶은 불치병을 진단 받는 순간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는 순간, 삶이라는 실체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날들을 최대한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기의 머리를 만져본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습니까? 이것은 다시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경험들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한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나 정신이 번쩍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별 아래에 살지만, 가끔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나요? 삶을 진정으로 만지고 맛보고 있나요? 평범한 것 속에서 특별한 것을 보고 느끼나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신은 세상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눈을 뜨는 매일 아침, 당신은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하루를 선물 받은 것입니다. 이번 생과 같은 생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이 생에서처럼, 이런 방식으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부모, 아이들, 가족과 또다시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결코 다시 이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이번 생처럼 경이로움을 지닌 대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
<도서 정보>제 목 : 인생 수업
저 자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공저/류시화 역
출판사 : 이레
출판일 : 2006년 6월
책정보 : ISBN : 8957090819 | 페이지 : 266 | 474g
구매처 : 오디오북/요약도서/Yes24/선물받음/헌책방/교보문고/영풍문고/TextFile
구매일 : 2006/6/24
일 독 : 2006/7/1
재 독 :
정 리 :
<이것만은 꼭>
<미디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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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데이비드 케슬러 |
데이비드 케슬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게서 말기 환자들이 평화롭게 삶을 정리하도록 돕는 일을 배웠다. 그는 마더 테레사가 캘커타에 세운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에서도 봉사하며 호스피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했다. 그가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첫 번째 책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필요한 것 The Needs of the Dying』은 마더 데레사의 찬사를 받으며 영국, 중국, 체코, 독일, 홍콩, 일본, 네덜란드, 폴란드, 대만, 스페인, 남미 등지에서 번역 소개되었다. 『인생 수업』, 『슬픔에 대하여 On Grief and Grieving』를 썼고, 현재는 시트러스 밸리 헬스 파트너스(Citrus Valley Health Partners) 의료원 원장을 맡아 가정 및 병동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음 직전의 사람들을 만나고 쓴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에 관한 기록. 죽음을 앞둔 뒤 인생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 '인생의 스승들'이 전하는 삶의 진실과 교훈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꼽히는 저자 자신이 2004년 눈을 감기 전에 남긴 마지막 저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는가?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기억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 삶의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과 뛰어난 사상가인 저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삶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일하고, 놀이를 하고, 별들을 바라볼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충실하게 살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단순하게만 들리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진심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리라. 잔잔한 문체와 감동적인 이야기가 오랜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책속으로>
배움과 깨달음의 책
인생 수업에는 행복하라는 숙제뿐 -류시화
1.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기
2. 사랑없이 여행하지 말라
3.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
4. 상실과 이별의 수업
5.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지 말라
6. 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7. 영원과 하루
8.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9. 용서와 치유의 시간
10. 살고 사랑하고 웃으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
데이비드 케슬러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