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돌뱅이 박형권, 때때옷 팔아 날개옷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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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사람이다...
땡전한푼없이 서울로 상경해서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아서 남의 몇배가 되는 얼급을 받았지만,
옷장사로 돈을 버는것을 보고 공장을 그만두고 옷장사를 시작한다.. 그만의 방식으로...
주위에도 옷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다.. 남들 하는 방식데로 하는것 같은데...
대충대충 먹고 살기보다 멋지게 성공하려면 역시 나만의 방법을 가지고, 만들고,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만들어 준다...
그리고 역시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몇년만의 10억을 벌었지만.. 자금관리 미숙과 남을 돕겠다는 마음에 쫄딱 망할정도로 부도를 맞았지만..
다시 재기하는 모습에서 될 사람은 된다는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열심히.. 나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자... 아자! 가자! 파이팅이다!



한 번의 값진 실패로 성공을 얻은 사나이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강한 의지와 노력, 그리고 실패를 기회로 역전시키는 긍정적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아동복상설할인점 ‘리틀짱’ 가맹사업을 펼치고 있는 박형권(37) 사장의 성공담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30여 개의 리틀짱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사장의 학력은 동대문 장사를 하며 어렵게 졸업한 야간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 그와 같은 연배의 요즘 성공했다는 벤처기업의 사장들에 비하면 정말 별 볼일 없는 학력이다. 그러나 박사장의 사업에 대한 노하우와 경영마인드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않다. 특히 극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과 판단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만의 장점이다. 박사장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20여 년간 사업을 하며 실패가 주는 인생의 쓴맛과 성공이 주는 단맛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일까.
박형권 사장이 장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된 ‘장돌뱅이’ 형을 따라 장사를 다니면서부터.
“아동용 조끼를 팔았는데 정말 불티나게 팔리더군요. 구경 삼아 따라 갔었는데 장사가 너무 잘되니까 제가 더 신이 나서 열심히 팔았던 것 같아요. 단숨에 100만원어치를 팔고 수고했다며 형이 제 몫으로 얼마를 떼어주더군요. 땀 흘려가며 힘든 줄 모르고 번 돈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더군요. 그때 맘먹었습니다. 장사를 해야겠다고….”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날로 번창했다. 청춘과 성실함을 담보로 시작한 사업인 만큼 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보따리 장사꾼이었던 그를 동대문의 작은 소매점포 사장으로, 도매업 사장으로 변신시켰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번의 시련은 찾아오게 마련. 박사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래된 어음 수표의 연쇄 부도가 난 것.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아 일단 총 8억원의 부도액 중 7억4500만원을 막고 5500만원만을 부도 처리했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 슬리퍼와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에 나앉게 됐지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정을 안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봉고차 한 대를 빌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재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낙 밑바닥부터 시작해 키워 온 사업이었고, 13년 동안 장사를 하며 쌓은 그만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운 회사가 바로 리틀짱이다. 실패 경험을 거울로 삼아 그는 체계적이고 내실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회사의 부채를 없애고 철저한 현금 결제로 지난날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가맹점주가 마음 편히 점포를 운영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원활한 재고 처리를 위한 무점포 가맹사업이다.
“옷 장사를 하면서 제일 부담스러운 것이 재고입니다. 그래서 점포 가맹점을 오픈하기 전에 무점포 가맹점을 먼저 모집해 점포에서 남은 재고량을 무점포에서 팔도록 했습니다.”
이밖에 두 번의 실패를 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는 가맹점 계약 후 이뤄지는 교육과 인테리어 공사를 직접 진행하는 것이나 가맹점 개설에 신중을 기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제게 한 번의 실패는 돈 주고도 얻지 못하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그 값진 경험을 바탕으로 가맹점주와 함께 성공을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듯 성공 또한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배가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글 정수현 사진 김경일 기자




내 자녀에 입히고 싶은 옷 팔죠”

박형권 사장(39)에게 하루는 하나의 연속된 시간이 아니었다. 4개의 독립된 시간이 모인 것이라는 게 그가 내린 하루의 정의였다. 밤과 새벽, 오전과 오후로 분명히 구분되었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서울 동대문시장 인근이다. 밤과 그 다음날 새벽까지는 동대문시장 근처의 리오 오피스텔에서 지방 상인들을 대상으로 옷을 팔았다. 새벽 5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에 그는 동대문 청평화시장으로 향한다. 도소매 판매를 위해서였다.

오전 10시에 일을 마친 그는 서둘러 택시를 탄다. 그의 세번째 일터인 노원구 태릉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순수하게 장사하는 시간만 따져봐도 하루 24시간 중 22시간이나 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이동거리와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 24시간 일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편안하게 잠자리를 찾는 것은 사치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는 따라서 수시로 졸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사업상 만난 자리에서도 곧바로 잠이 들었다. 자리에 앉았다 하면 3초 내에 고개를 떨구는 그를 두고 주변에서 별명을 붙여줬다. ‘3초’가 바로 그것이다.

“95년부터 98년까지 3년 남짓을 3초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박형권이라는 사람은 세상에 살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옷을 파는 기계인간이 있었을 따름이지요.” 박사장을 3초 인생으로 몰아넣은 10억원대의 빚. 동대문시장 등지에서 대규모로 옷장사를 벌이던 박사장이 진 빚은 무려 16억7000만원이나 됐다. 방만한 경영과 관리부족이 원인이었다.

부도로부터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살고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따름이었다. 그들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는 판단뿐이었다.

일단 시작했다. 명확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빚을 갚을 것인지조차 계획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일했다. 일에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가끔 잘 나가던 때를 못잊고 괴로워 했지요.” 일에 전념하면서 다행히 과거는 서서히 잊어져갔다. 빚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부도 이후 1년만인 96년 말이 되자 박사장은 비로소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98년에 박사장은 모든 빚을 정리하게 된다.

“동대문에서 3년 동안 빚은 세상의 전부였고, 내가 사는 명제 역시 빚갚기 였습니다.” 98년 8월. 그는 동대문 시장을 미련 없이 떠났다. 당시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빚 또한 없었다. 무엇보다 3초 인생에서 탈출하고픈 마음 뿐이었다.

83년에 장돌뱅이로 옷하고 처음 인연을 맺던 18세 청년으로 되돌아갔다. 봉고차 한 대를 가지고 서울 인근의 재래시장 등을 찾아 다녔다. 장돌뱅이 생활에서 그는 점차 활기를 찾았다. 3초인생에서 굳어진 얼굴에도 웃음이 찾아들었다. 옷장사는 잘되었다. 옷을 고르는 탁월한 안목이 빛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입히고 싶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구매를 결정하죠. 그게 바로 시장에서 먹혀들고요.” 이는 ‘제대로 된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생산자가 될 수 없다’는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주장과 합치되는 대목이다.

장돌뱅이 생활은 또한 박사장이 사업을 재개하는 단초를 마련해주는 계기도 됐다. 시장을 돌면서 그는 프랜차이즈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이 물결이 앞으로 옷시장을 좌우하는 커다란 흐름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과거처럼 동대문시장에 파묻혀 있으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던 깨달음이었지요.” 2002년 4월 박사장은 서울 양재동에 사무실을 오픈했다. ‘리틀짱’ 아동복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개한 것이다. 기존 아동복 프랜차이즈와는 달리 차별화정책을 분명히 했다. 계절마다 2000여 개의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구비,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이는 경쟁업체보다는 많게는 10배나 되는 풍부한 아이템이다. 시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그가 거래선이 남다른 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100% 반품처리도 단행했다. 이는 의류프랜차이즈 시장에서는 획기적인 것. 그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맹점 매출이 단시간에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10평 내외의 매장에 월평균매출이 3200만원을 넘어섰다. 평당 월평균 매출이 300만원을 넘는다는 것은 매장이 활성화됐다는 증거다.

가맹점은 2004년 4월 현재 약40개. 짧은 기간에 후발주자로서는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리틀짱의 성공에 힘입어 박사장은 올 상반기 중 아동복과 관련해 제 2브랜드를 런칭 할 계획이다. 제2브랜드의 성공적인 이륙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 아동복과 감성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박사장은 감성적인 사람입니다. 감성을 마케팅에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사업가라는 말이지요.” 10년 넘게 그를 지켜본 ‘작은가게창업연구소’의 심상훈 소장의 말이다.

굳이 주변의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성공은 일찌감치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3년간의 3초 인생이 바로 성공보증수표다. 특히 신용불량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의 다음 행보가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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