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 - 23전 23승 이겨놓고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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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 스페셜판...
대단하다가 알고 있지만, 언제봐도 대단하신... 이순신 장군...
이편에서는 이순신 리더십에 대해서도 분석해주고, 그 동안의 행적을 둘러보며, 역사적, 문학적인 이야기 및 일본에서 바라본 시각 등도 자세하게 소개해준다.
리더십의 기본은 바로 원칙이고, 솔선수범하는 단순하면서도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한번 알려준다.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완결)
이순신 장군은 오늘을 살아 가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의 인물에 머물러 있지 않다.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 보다 더 지독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지금, 4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장군은 우리의 가슴 속에 의연히 살아 있다.

▲ 장군은 임진년 개전 이후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룰 때까지 23전 23승이라는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장군은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적을 타격했다. 포화를 퍼부었고, 화시를 날려 배와 적을 불태우고 수장시켰다. 때로는 좁은 해협으로 달아난 적을 큰 바다로 끌어내 학의 날개 모양으로 포위한 뒤 집중포격을 가했고, 때로는 좁은 해로를 막고 일렬종대로 밀려오는 적을 차례로 쳐부수었다.

매 전투마다 쉬운 전투가 없었지만, 장군은 신출귀몰했다. 적들은 공포에 떨었다. 장군은 오직 눈앞에 나타난 적을 상대로 싸웠다. 그리하여 임진년 개전 이후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룰 때까지 23전 23승이라는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장군의 불패신화가 그립다. 장군이라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기적과 같은 성과를 이루어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장군을 알고 싶다. 우리는 4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장군이 호령하던 바다로 가본다. 장군에게 우리가 가야할 길을 묻는다. 장군이시여, 길을 가르쳐 주세요. 창업투데이는 장군의 가르침을 좇아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주]


옥포해전, 첫 번째 전쟁, 이겨야 한다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1)


장군은 장검을 높이 들었다. 장수와 군졸들도 창칼을 높이 들고 함성을 올렸다. 출전의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천지신명께 원하노니 적들을 크게 무찌르게 해주옵소서.

1592년 5월 7일, 장군은 28척의 전선을 이끌고 옥포를 향해 나아갔다. 적은 선발부대가 옥포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남해로 바닷길을 임무를 맡은 최선봉 부대의 적장은 도도 다카도라였다. 적은 부산진, 김해, 율포를 유린한 후 바로 전날 옥포에 도착해 있었다. 옥포만에는 50여척이 정박해 있었지만, 뒤에는 700여척의 대함대가 서해를 거쳐 한성까지 올라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장군은 함대를 적선 앞으로 출전시켰다. 적들도 전투태세를 취하고 나섰다. 실전 경험이 전무한 병사들이 눈앞에 적을 두고 흥분하고 허둥됐다. 장군은 미리 준비한 깃발을 올렸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산처럼 장중하게 움직여라'(輕擧妄動 靜重如山)라고 쓰여 있었다.

▲ 장군은 달려드는 적선을 향해 함대를 횡으로 돌려 일자형태로 진형을 만들어 적의 뱃머리와 함대의 측면이 맞서게 했다. 적이 전방의 포 한발을 날릴 때 아군은 측면의 포 10발을 작렬시킨다. 정(丁)자 타법이다.

낮 12시경 운명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적들은 호기있게 밀고 나왔다. 장군은 달려드는 적선을 향해 함대를 횡으로 돌려 일자형태로 진형을 만들어 적의 뱃머리와 함대의 측면이 맞서게 했다. 적이 전방의 포 한발을 날릴 때 아군은 측면의 포 10발을 작렬시킨다. 정(丁)자 타법이다.

적선은 불타오르고 격침됐다. 불타는 적선에서 적병들이 낙엽처럼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아귀비환이 따로 없었다. 적장은 물에 뛰어들어 인근의 섬으로 피했다가 수일만에 뗏목을 타고 간신히 도망갔다. 50척의 적선 가운데 26척이 격침되고 적군 4080명이 도살됐다. 장군의 함대는 전선 피해나 전사자가 전무하고 부상자가 단 2명 뿐이었다.

포격중지! 장군은 명령했다. 순간 죽음의 전쟁터는 정적에 휩싸였다. 이게 진정 현실인가? 우리가 승리한 것인가? 곧 승리의 함성이 온 바다를 가득 메웠다.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부등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창업Tips> 창업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

장군의 장검에는 유명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라고. 원문은 三尺誓天 山河洞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이다. 장군에게 전쟁이란 무엇이었던가? 침략자를 무찌르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창업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경제전쟁시대에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일에 동참할 뜻이 내게 있는가?


사천포해전, 거북선 돌진하다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2)


옥포해전의 대승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일본 수군은 옥포에서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륙병진책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군은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출전을 서둘렀다.

사천포에 적선 12척이 정박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5월 29일 장군은 23척의 함대를 이끌고 사천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함대가 접근하자 적들은 완강히 저항하고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적을 먼 바다로 유인하기로 했다.

▲ 창업을 전쟁에 비유한다면 거북선급 신무기가 필요성은 절실하다. 사업에서도 경쟁에서 이기면 생존하고 패배하면 사멸하기 때문이다.

적선이 전투를 치루기 유리한 해역까지 따라 나오자, 장군은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 거북모양을 한 이상한 배가 빠르게 뛰어나와 머리에서는 연기를 피우고 사방으로 화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세계최초의 철갑 돌격선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거북선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의 대장선을 박살내 버렸다. 적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적선 13척을 격파하고 적 2,600명이 배와 함께 불에 타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아군측은 거북선 건조의 책임자인 군관 나대용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장군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장군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했다.

<창업Tips> 신무기로 무장하라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하루전에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완성했다. 그리고 사천포해전에서 그 위용을 선보였다. 적들은 거북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눈먼 배'(盲船)라고 했다. 진영 깊숙이 들어와서 좌충우돌 배들을 깨부수니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창업을 전쟁에 비유한다면 거북선급 신무기가 필요성은 절실하다. 사업에서도 경쟁에서 이기면 생존하고 패배하면 사멸하기 때문이다.


당포해전, 적의 핵심을 부수다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3)


1592년 6월 2일 장군은 적선이 당포에 정박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 그곳으로 출진했다.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가 인솔하는 적선 21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오전 10시경 장군은 학인진의 깃발을 올리고 거북선을 앞세워 진격해 들어갔다. 돌격대장 이언량은 맹렬히 돌격해 적의 대장선을 노렸다. 거북선을 적선의 밑을 치고 들어가 거북머리의 현자포로 적장이 서 있던 층루를 무너뜨렸다. 우리 장수들이 적선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다.

▲ 당포해전은 창업자들에게는 한정된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장군은 거북선을 내세워 수십척의 적선으로 둘러싸인 적의 대장선을 격파, 기선을 잡았다.

장군의 함대는 대장선을 잃고 허둥대는 적 함대를 철저하게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적선 21척을 모두 격파하고 적 2,820명을 도살하였다.

6월 4일 이억기 장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도착해 52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했다. 6월 5일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에는 적선 26척이 정박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에 놀라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해왔다. 장군을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했다. 적선을 모두 격침시키고, 적 2,700명을 도살하였다. 율포에서는 3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3척을 나포했다.

<창업Tips> 핵심을 파고 들어가라

당포해전은 창업자들에게는 한정된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장군은 거북선을 내세워 수십척의 적선으로 둘러싸인 적의 대장선을 격파, 기선을 잡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 적의 가장 견고한 곳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한산대첩, 적을 사지로 보내다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4)


장군은 연전연승했다. 1592년 7월 7일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좀더 강한 적군과 조우했다. 제1진으로 나선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3척을 이끌고 왔다. 2진에 구키 요시타카, 3진에 가토 요시아키 등이 호응하고 있었다.

장군은 와키자카의 일본수군이 견내량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견내량에 정박해 있는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적을 모조리 잡을 계획을 세웠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장군은 연전연승했다. 1592년 7월 7일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좀더 강한 적군과 조우했다.

장군은 13척의 배를 보내 적을 유인했다. 적장은 전공을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밀고 나왔다. 유인작전으로 조선 수군은 조금씩 후퇴하고 적선들은 한산도 앞 바다까지 뒤쫓아 왔다.

적선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은 뱃길을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적선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화포를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살랐다. 적선 73척 중 59척이 격파되거나 불태워졌고 적장 와키자카는 도망쳤다.

전투에 참가한 1만여 명의 적병 가운데 8980명이 도살되었고, 400여 명이 한산도로 도망쳤다가 210명이 잡혀 죽고 190명만이 겨우 탈출했다. 한산대첩으로 적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을 걸렸고,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모든 화포를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살랐다. 적선 73척 중 59척이 격파되거나 불태워졌고 적장 와키자카는 도망쳤다.

한산대첩 후 장군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자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 가토 등 적장은 와키자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숨어 있었다. 장군은 수심이 얕은 포구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자,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파괴했다.

<창업Tips> 내게 유리한 곳에서 싸워라

한산대첩이 장군에게 맞선 적장은 용인전투에서 단지 1,500명의 군사로 조선 육군 5만명을 패퇴시킨 장본인이었다. 장군은 전공에 눈이 먼 적장을 넓은 바다 한 가운데로 이끌어내 전멸시키는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를 썼다. 한산도 앞바다로 이끌려 나온 적은 학인진으로 공격하는 조선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내게 유리한 곳에서 나의 장점을 발휘하라.


부산해전, 적 소굴을 두들기다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5)


적의 소굴 부산포에는 약 470척의 적선이 정박해 있었다. 장군은 이들을 찾아내어 격파하여 우환을 근본적으로 없애려 하였다.

9월 1일, 장군은 부산포를 향하여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수적으로는 3배 가량 많았고, 지리조건도 적군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고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불리한 형국이었지만, 적들은 이미 장군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임진년 한 해동안 장군은 17번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392척의 적선을 격파, 3만 4,000명의 적을 몰살시켰다.

조선수군의 기습공격에 응전을 해온 적선은 4척에 불과했다. 4척을 격파하고 불태웠다. 적들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방파제 안에서 종일도록 포격을 당하고도 꼼짝도 하지 않은 세계해전사상 유례를 없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장군은 날이 어두워지기까지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적선을 두들겼다. 적선 100여척이 격침되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살상되었다. 이 전투에서 장군은 아끼던 녹도만호 정운을 잃었다. 장군은 이후에도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적을 궤멸시키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창업Tips> 이길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라

임진년 한 해동안 장군은 17번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392척의 적선을 격파, 3만 4,000명의 적을 몰살시켰다. 반면의 조선 함대는 한척의 배도 잃지 않았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해 약 240명의 피해를 그쳤다. 세계해전 사상 불가사의한 이런 전과는 어떻게 이루어낸 것일까? 장군은 손자병법에 있는 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 즉 이겨놓고 나가 싸운다는 병법에 충실했던 것이다.


명량해전, 바다는 울고 있었다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6)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 일으켰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다시 선봉에 세우고 14만 7500명이 투입되었다. 침략군의 기본전략은 수진병진책이었다. 서해안을 통해 한성으로 쳐올라간다는 전략이었다.

7월 15일 새벽 4시경, 일본 수군은 칠천량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바뀐 조선 수군을 격파했다. 7월 17일 일본군은 이미 북진중인 우군을 제외하고 좌군과 중군의 10만 대병이 서해를 돌아 한강으로 상륙시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일본의 좌군과 중군은 일제히 서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산에서 출발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웅천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에서, 모리 요시나리와 이토 우헤이는 안골포에서 출발하였다. 사천에 집결한 적군의 일부는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 구례와 남원성을 함락시킨 다음 마음껏 유린하고, 다시 바다로 내려와 전라우수영을 목표로 진군하였다.

▲ 바다는 울고 있었다. 그 바다에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다시 섰다. 장군은 남아 있던 13척 전선을 이끌고 최후의 전쟁터로 명량해협을 선택했다.

바다는 울고 있었다. 그 바다에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다시 섰다. 장군은 남아 있던 13척 전선을 이끌고 최후의 전쟁터로 명량해협을 선택했다. 명량 해협은 폭이 평균 500m 밖에 안되고 물살이 빠른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일본 수군의 연합함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도도 다카도라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합세하고 있었다. 미치후사는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친형의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봉을 자원하고 있었다.

9월 16일 미치후사는 133척의 정예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했다. 70여척의 제2 함대가 그 뒤를 따랐다. 일본 수군이 명량 해협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12시경이었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해협 끝에는 조선 수군이 일자진으로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적선에 집중포화를 날렸다. 적의 대장선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적장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장군은 적장 미치후사의 목을 대장선 돛대 꼭대기에 매달았다.

12시경부터 시작된 해전이 3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 물살이 뒤바꿨다. 이 때를 기다려온 장군은 전함대에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선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려 하였다. 적선들은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다 연쇄적으로 충돌하였고 빠른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추격해 온 조선 수군의 화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장군은 불과 13척의 배로 200여 척의 일본 함대 중 무려 133척을 쳐부쉈다. 명량 해협은 일본수군의 시체들로 뒤덮였다. 명량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의 수륙병진책은 무너졌고, 한성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 우군도 남해안으로 총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창업Tips>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장군은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사람을 두렵게 한다고 했다. 또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生卽死 死必卽生)고 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휘하 장수와 병졸들에게 전투의지를 불태우기 위한 한말이다.


한척의 배도 돌려 보내지 마라
[특별기획] 장군, 길을 가르쳐 주세요(7)


장군은 순천 왜교성에서 농성중인 적장 고니시가 바다를 통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해상을 봉쇄하고 있었다. 무기와 식량이 바닥난 적은 다시 제 나라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독안에 든 쥐꼴이 되어 있었다.

1598년 11월 18일 저녁 6시경 적선이 노량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장군은 적을 격멸하기 위해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11월 19일 새벽 2시경, 사천, 고성, 부산, 남해 등지에서 몰려온 500여척의 적 함대와 불꽃튀는 난투전이 시작됐다.

▲ 해전은 춥고 달 밝은 밤의 전투였다. 화포가 쉴새없이 발사되고 화시를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치열한 전투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전투를 계속하는 동안, 200여척의 적선이 격파되고, 수장시킨 적은 4만명을 헤아렸다..

해전은 춥고 달 밝은 밤의 전투였다. 화포가 쉴새없이 발사되고 화시를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치열한 전투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전투를 계속하는 동안, 200여척의 적선이 격파되고, 수장시킨 적은 4만명을 헤아렸다. 전란 이래 최대 규모의 격전이었다.

최후의 해전이 막마지에 이른 19일 새벽 장군은 지휘독전 중에 적의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장군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이 전사하였고, 임진년에 거북선 돌격장으로 활약한 군관 이언량도 이 싸움에서 최후를 맞았다.

<창업Tips> 오직 한 마음으로 정진한다면...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장군은 최후의 결전을 앞둔 1598년 11월 18일 밤 함상에서 손을 씻고 향불을 피우면서 하늘에 빌었다. 장군은 19일 새벽 마지막 싸움터에서 죽음을 맞았다. 장군과 위대한 조선 수군의 장수들은 한척의 배도 돌려 보낼 수 없다는 오직 한 생각으로 죽음을 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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