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다큐 Root Of All Evil - 1부 신이라는 망상, 종교는 모든 악의 근원?
1부에 이어서 종교에 폐해에 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2부에서는 아이들이나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믿음의 폐해에 관해서 집중 조명을 한다.
현대 사회가 점점 합리화되고, 과학이 발전하면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이 많아질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의 현상이 나오고 있는데,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절대 타협할수 없는 경직된 도덕관과 어린 아이들에 대한 우려를 주로 돌아본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적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고, 아이들은 뜨거운것을 만지면 안돼라는 말처럼 그 종교적 믿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것인데, 미국에서는 무슨 지옥체험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이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리처드 도킨스 박사의 당신은 강간이나 살인을 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봐 그러시냐는 질문을...
그리고 성경속에 나온 인물중에 몇명을 분석을 해보는데, 꽤 잔인하고, 비정한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왜 신은 우리를 그냥 용서해 주지 않고, 신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냐는 질문이 머리속에 맴돈다...
낙태를 해주는 의사를 살인하고 사형을 당한 목사는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과연 신은 그에게 뭐라고 했을까?
방송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한 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세상에 종교가 없다면 좋은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지만, 종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일을 하게 만든다고...
물론 진보적이고, 중도적인 분들도 나와서 인터뷰를 하지만, 종교로 인해서 사람들이 호기심이나 세상에 대한 경외심을 반감시키며... 신과 내세를 부정한다고 우리가 불행해지는것이 아니라, 현세를 더욱 즐겁게 보낼수 있으며, 영원한 축복을 위해서 현실을 인내할 필요가 없고, 지금 이자리, 이순간에 충실할수 있다는것이 도킨스 박사의 말이다.
뭐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한 다큐이기는 하지만, 종교인이거나 비종교인이거나 신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볼수 있는 멋진 다큐이다...
방송을 보고 싶으면 아래의 링크에서 보면 됨...
http://www.pandora.tv/my.abbasolo/34241546
신은 없다 (Religulous) -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대화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 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 2부 무함마드, 예수를 만나다.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 3부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 4부 길 위의 인간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 홈페이지 자료
만들어진 신 | 상세보기 |
|
|
번역/자막:김기현(눈먼시계공/베쑤선생)
삶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학은 이 세상의 나이가 얼마정도인 지를
주장하는 종교적인 신화를
지속적으로 뒤집어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 회교도들은
이성을 외면하고
영원히 그 존재를 밝힐 수 없는
‘전지전능한‘ 창조자의
존재를 믿으려 합니다.
저는 과학이 종교적인 믿음을 하나 둘
단념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과학에게 패배하기는커녕 과격한 종교적 믿음은
전 세계에서 여전히 승승장구 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며 말입니다.
과학자로써 저는 종교적 믿음이 과학의 존재를
계속해서 깎아내리고 그 중요성을 축소하는
방식에 대한 근심이 점점 커져갑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반드시 저항해야할 사항입니다.
그 이유는 비이성적인 믿음은
전 세계에 걸쳐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도킨스 (옥스포드대 석좌교수)
2부에서는 종교의 심각한 문제점
2가지에 대해 짚어 보겠습니다.
저는 종교가 타협이 불가능한 경직된
도덕관의 형성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저는 어린이들에 대한 종교의
주입현상에 대해 특히 큰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믿음이 어떤 식으로 바이러스와
같은 작용을 하며 어린이들을 공격하며
세대에서 세대간으로 감염이
일어나는 지를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살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과연 고대의 신화가
학교에서
진리로 교육되어야 하는 지를 묻고 싶습니다.
도킨스 교수님. 정말 감명 받았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새로운 메시아요.
당신이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이제는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지옥의 불길이나 저주와 같은 미신적인 생각으로
위협하며 악용하는 사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어린이들이
지옥이야 말로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면 합니다.
이 아이는 성직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낙태를 당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던 거야!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경적인
도덕체계의 근거가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적인 지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그대는 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도 살려두지
말지어다. 다만 그대는 그들을
철저하게 파괴해야만 하느니라.’
‘파괴하라’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런 얘기나 들어있는 책을
숭배하고 있다니..
과학은 증거를 높게 평가하면서
진보합니다.
반면 종교는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믿음을 위한 믿음’이라는 식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해로울 뿐더러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롭습니다.
종교는 모든 악의 근원인가?
분리교육을 하는 종교학교의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지난 수 백 년 동안을 우리가 이를
지켜보고 이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더라면
지독하게 기괴한 방식의
교육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2부 '종교라는 바이러스'
분리 종교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판명이 되어왔습니다.
끔찍한 문화적 유산으로
아이들에게 남겨지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동적으로 조그만 아이들을
부모의 종교에 따라
이름을 붙여 버리는 행위,
정말 이상한 행동 아닙니까?
이 아이들은 ‘유대교 어린이들’입니다.
예루살렘의 다른 구역에서는'이슬람교
어린이들'을 볼 수도 있죠.
북 아일랜드에서는 ‘카톨릭 어린이들’과
‘개신교 어린이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은 모두
분리된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종교가 대체 무엇이 대단하길래
이렇게 어린이들을 멋대로
카톨릭이니 개신교니
유대교니 이슬람교니 낙인을 찍어도 좋다는 것입니까?
부모의 지지정당에 따라
아이들을
토리당 어린이니 노동당 어린이니하며
분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정치적 성향에 대한 질문을 이해하고
판단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것에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왜
우주와 인류에 대한 질문들을 가진
종교의 경우는 예외라는 것입니까?
유전적 진화의 경우를 보면
하나의 종이 둘로 나뉘어 져서
초기의 지리적인 격리를 통해서
서서히 유전적으로
서로에게서 분리가 됩니다.
두개의 아종(종의 하위개념)으로 말이죠.
초기의 지리적인 격리를 통해서
서서히 유전적으로
서로에게서 분리가 됩니다.
두 개체 사이에는 그 어떤
유전자적인 교류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다른 종이 되고 마는거죠.
이것이 바로 종 사이의 분열을 일으키는 힘이죠.
분리교육은 이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어린이들은 초기에 부모의 믿음의
차이에 따라 서로 격리됩니다.
그리고는 그 차이점이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훈련으로 주입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삶의 궤적에 몸을 싣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분리작용은
이스라엘에서 뿐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서
북 아일랜드를 보면, 혹은 런던에도 권장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런던 북쪽에는
유태인의 대규모 거주지가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과 뉴욕에 이어
세계 3번째의 규모입니다.
이곳의 종교에 의한 분리는
그 극단을 치닫습니다.
이러한 초 정통파 유태교인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집단 내에서만 결혼을 하며
텔레비전 시청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이며
물론 어린이들은
독자적인 종교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그들의 집단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있을만한
외부로부터
모든 영향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죠.
저는 이 아이들이 왜 격리 수용되는 지를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들의 문화가 외부 현실에
마음을 여는 것을 허락 하는 지도 궁금했습니다.
글룩 랍비님. 저는 리처드 도킨스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들어오세요.
- 감사합니다.
랍비 글룩은
런던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 분의 영어를 들으면
런던태생이며 이곳에서 자랐다는 것을)
거의 알아차리시지 못할 겁니다.
그의 히브루어(이스라엘어)식 영어 액센트야 말로
이런 종교구역의 격리의 효과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거입니다.
왜 어린이들이 자기들이 우연히도
태어나게 된 그 사회의 전통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희생양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가능한 모든 선택의 근거를
접해 본 후에 자기들의 의사로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진공상태에서 사는 사람 같은 건 없는 거죠.
우린 모두
부모와 가족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에겐 그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존재합니다.
저는 소수인종들에게는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고, 스스로의 기원에 대해
배울 공간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그렇게
현대과학적으로는 거짓에 불과한
우주에 대한 유대교적 시각을
강요하지 않고
관습과 전통과 역사를
보존 할 수는 없을 까요?
저라면 아무것도 ‘강요’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물론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신이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고..
물론 진화에 대해서도 압니다.
모든 유태인들이 다 그렇죠.
그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도 해왔고요..
이야기가 어찌 되어가는 것인지(왜 그 둘이
서로 모순되는 지)에 대해 성찰도 해왔죠
랍비님의 교육시스템을 경험한 후에도
진화론을 결국은 믿게 되는
어린이들의 비율은 얼마나 됩니까?
제 생각은.. 그들 중 대다수는
진화론을 믿지 않습니다.
물론 동시에 믿지 않는 이유는
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죠.
혹시 현대 고고학자들이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시기가 지난 이후에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이 곳의 어린이들이
현재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십니까?
제 말씀은 이 아이들이 정말이지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는 세계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어린이들이 제가 ‘잘못된 교육’이라고 밖에는
묘사할 수 없는 이런 종류의 교육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제게는 ‘왜곡’이니 ‘잘못된 교육’이니
하는 용어가 다소 거슬리는 군요.
유대교는 자신들 만의 전통이 존재합니다.
제 생각에는 다양한 과학자들도
자신들만의 전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은 아직도
진화‘이론’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칭의 기술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어쨌건 그렇게 불리잖소.
진화의 ‘법칙’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저라면 진화라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신은 진화론의 근본주의자이시구먼.
저는 근본주의 진화론 신자가 아닙니다.
지구의 나이가 5천년이라니.
. 이런 말씀해서 죄송합니다만 랍비님
그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글룩 랍비의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저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순진한 아이들이 명백한 거짓을
배우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유대인 소수집단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권의 학교들에서 과학적 진실을
원시적인 창조신화와
동등한 것으로 가르치는 데서
발생하는 압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학교에서는 왜 과학시간에 그냥 과학을
가르치지 않고 종교와 연관을 시켜 가르치는 걸까요?
당신은 자꾸
‘이건 증거가 있기 때문에 진리다’라고 그러시는데
정말 우스꽝스러운 대답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었는데요.
우리 과학자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 그 진리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나의 말이 진리 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죠.
우리는 과학이
종교적 미신이 명백히 거짓임을
밝혀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에서 비롯한
공포의 그늘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종교학교의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우리의 교육체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사항 덕분이기도 합니다.
영국에는 이미 7천여 개의
종교학교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더 많은 학교의 신설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신설 시립학교의
절반 이상이 ..
종교적 성향을 지닌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니 그 능력을
저희에게 부어주소서 아멘. .
가장 염려스러운 점은 신교 정통파
사립학교들의 새로운 발달 방식입니다.
이들은 미국 침례교학교의
ACE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Accelerated Christian Education(강화 기독교 교육).
이 교육방식은
종교적인 미신을 과학에
다시 슬그머니 끼워 넣는 방식입니다.
별 배려 없이 말한다면 이 교육방식은
갇혀진 틀의 교육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예의를 갖춰 말한다면
개인화된 학습지도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렇군요.
그래서 각 학생들은 어느 수준까지는
진정한 자기주도 학습을 하게 됩니다.
물론 교사들의 감독과 관리를 통한
수정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그렇게 되는 거죠.
귀교의 과학교육에 대한
커리큘럼 책을 들여다 봤는데요
확연히 신과 예수가 거의 모든 사항에
관련이 되어 있더군요.
저희는 따로 종교교육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일반수업 자체가 그냥..
물론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네 그렇죠.
과학과목의 한 단원에서 갑자기
노아의 방주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그것이 대체 과학수업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읽는 사람의 의견에
많이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 이야기를 믿는 다면
그건 과학과 많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 어릴 적에 학교의
과학시간에 배운 것들을
지금은 그저 허황된 이야기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들을 사실이라고 배웠습니다.
어떤 것을 배우셨는지?
선생님에게 배운 것 중 늘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달이 지구의 바다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 지구에서 튀어나와서
우주공간으로 나갔다는 거죠.
제 생각으로는 목사님이
배우셨어야 할 사실은
아직도 그것이 달 발생의 기원이라는
강력한 이론이 존재한 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부정되고 있는 이론이 아니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런 것이겠죠.
‘정말로 창세기가
진실이고 신이 7일 만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을 믿느냐?’
그렇죠?
제 대답은..
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신이 자신이 원한다면 7일 만에 세상을 창조할
능력이 있다고 보느냐?’ 라고 묻는 다면
그럴 것 같다고 대답할 것 같네요.
못 하시는 일이 없죠..
고로 그런 일종의..
학구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이치에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제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저는 그 대답에
관심이 많거든요.
왜 그렇죠?
저는 진리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진실에 대해 물론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기독교라는 그 자체가 삶이라고 봅니다.
삶의 모든 것을 창조하는 기능이 있다고 봅니다.
모든 것에 관한 것이죠.
교육, 정치, 복지, 사회봉사 등등..
책의 내용에 대해 또 다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AIDS와 HIV 바이러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요.
에이즈가 죄의 대가라고
진술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교육과 종교적인 설교를
뒤섞어 가르치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될까요?
제가 보기에는 그 이면에는..
신이 없다면 법률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제가 하는 나쁜 일이 문제가 됩니까?
왜 그것이..왜 강간이 옳지 못하죠?
왜 어린이에 대한 성도착증이 틀린 일입니까?
왜 이런 일들이 다 그르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법을 내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말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그러니 목사님이 훔치거나 강간하거나
살인을 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을 까봐
무섭기 때문이라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은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아무런 결과가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고
거기서 발을 뺄 수 있다면
실제로 그 짓을 저지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세상을 둘러보세요
그게 바로 현실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네요.
애이드리안 호크스 목사는
분명 좋은 분입니다.
하지만 왜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현실‘을
아이들에게 강요해야 하는 걸까요?
학생들은 그 성경의
괴상한 주장을
과학적 진실과 함께
배워야만 할 뿐 아니라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저의 느낌으로는
일그러진 윤리로 보이는
사상을 주입당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에 대해 이런 종교가
왜 위험한 바이러스와 같은
작용을 한다고 여기는 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교사와 성직자들에
의해서 일부 감염되며
또한 세대간에도 부모에게서
아들 딸에게, 손자들에게 감염됩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이 종교라는
바이러스의 감염에 매우 취약합니다.
어린이들은 영향력이 있는 인물에게
배운 지식을 자동적으로 축적하도록
유전적으로 미리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줄 위에 서볼래? 옳지.
여기를 잡아봐. 아니 여기. 거기
꽉 잡았어? 잘했어. 잘했어.
어린이의 두뇌는 다윈의 이론으로
아주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두뇌는 어른들이 하는 말을
믿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어린이들이 이런 말을 듣고 정말인지
실험을 해 볼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
‘절벽 근처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라’ 라던지
‘강에는 악어가 있으니 수영을 하지마라‘라는..
어떤 아이들이건 그런 말들에
‘어떤 이론이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학적인 태도’를
적용시켜 보려고 하는 아이들은
죽고 말테니까요.
그러니 성서의 사사가
‘그 아이의 처음 7년을
내게 맡겨 달라.
그럼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어 주마’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닌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두뇌는 비록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듣더라도
자동적으로 이를 믿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이 자라나면
그들은 바로 그 똑같은 헛소리를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전수하게 되는 거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이런 속임수입니다.
또한 종교는 세대에서 세대간으로
전파됩니다.
당신이 죽게 되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죄인? 아니면 승리자로?
죄인이 되지 말고 승리자가 되세요.
많은 사람들에게는 성장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라는 좋은 약을 통해서
종교라는 바이러스를
서서히 죽여 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이런 바이러스를 떨쳐버리는 데 실패한다면
그의 정신은 영원한 유아기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다음 세대를
감염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종교를
직접적인 아동학대의 한 사례로 경험했었던
한 분을 만나보려 합니다.
그녀는 매우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심리학자로
자신의 것과 유사한 이런 편협한 종교적인 가정환경으로
상처를 받은 젊은 이들의
재활을 돕고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다른 관점을 들으며
자랄 수 있도록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또 의심하는 것에 대해 조사를 해보고
비판력을 기를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
그렇게 함으로서 수많은
다른 견해를 기르고
어느 견해가 그들을 위한 것인지 저울질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나갈 길을 찾아야지
어린시절에 부모의 압력 때문에
특정한 사고로 굳어져 버리면 안 됩니다.
제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건 정말
공포에 의해 지배당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종교에 대한
부정의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지옥의) 영원한 저주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지옥불이나 그런 것으로
위협을 하던가요?
그럼요.
그리고 어린아이로서의 그 지옥불의 이미지나
이를 갈게 만드는 공포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전혀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이죠.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자유롭게 사고하지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해 버리면
제게는 어디까지나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학대죠. 심리학적 학대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죽으면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도 어린이 학대죠.
뭐라고 하던가요?
지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정말 이상하죠?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그런 질문은 누군가 내게 던질 때마다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위력이 있으니 말이죠.
(아직도 지옥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옥은 정말 무서운 곳이죠.
신에 의해 완벽하게 거부당한 곳이죠.
궁극의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
불길이 타오르고.. 지독한 고통과 고문이 존재하고..
영원히 지속되죠.
구원을 받을 길은 전혀 없는 곳이죠.
지옥 체험 관
다음의 동영상이 귀하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이여.. 돌아와 주세요.
지옥을 윤리를 단속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엄청나게
거슬리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이런 죄악에 대한 강박관념이
‘지옥체험의 집’이라는 전국적인 광기를
낳았습니다.
신교 정통파들이 즐겨
도마위에 올리는 낙태와 동성애를
말 그대로 악마화한
공포스러운 연극으로 구성해
할로윈의 괴물쇼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키넌 로버트 목사는
그가 각본을 쓰고 거의 15년동안 상연시킨
콜로라도에 위치한 ‘지옥의 집‘ 연극의
새로운 버전을 리허설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선하게 만들려면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야 한다는
강렬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목사로서의 제 삶의 소명과,
성직자로서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와 저희 교회와
우리나라의 전역과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이 해 온 일은
창의적이고 영향력이 큰
효과적인 도구를 찾아 낸 것입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을 정도의..
그래서 메시지를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거죠.
지옥의 집
우리는 그들의 일생에
‘죄악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는
강렬하고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기고 싶습니다.
연극의 모든 장면들은
진리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죄악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혹은 ’예수님은 구원이다‘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요
그냥 의학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저 생각을 바꿨어요. (낙태를 안 할래요)
이 정도가 리허설이라니 .
완성된 작품은 얼마나 무시무시할 지
상상해 보시죠.
제 생각에는 이 연극이 관람제한 연령이
있을 듯 한데요. 몇 살 이하는 볼 수 없다는..
기준이 몇 살입니까?
다년간을 많은 관객들이 와서 관람을
시켜본 결과
이 프로그램을
관람 할 최적의 나이는
12세정도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죽이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당신의 선택이지.
너무 편리하거든.
혹시 12살 먹은 어린이가 이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집에 가서는 .
악몽을 꾸지 않을 까 걱정해 보신 적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에 드실까요?
저는 그들이.. 저는 그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죠.
그들이 지옥은 정말로 그 누구도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저는 어린이들이 12살 정도에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
그 메시지가 도달하지 못해서 죄악의
삶을 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게 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죠.
귀하들은 그대들이 정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원히 믿을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가?
신이 그대들을 이렇게 만든데 책임이
없다는 것도 믿겠다고 선언하겠는가?
동성애 결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슨 해를 끼치나요?
왜 그렇게 열정적으로 그것에 대해
반대하십니까?
죄악 속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건 목사님의 의견일 뿐이지 않습니까? 동성애 결혼은
목사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습니까?
그들의 의사결정에 달린 일 아닙니까
아니오,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죠.
저는 성경에 써있는 말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의견’이죠.
두 사람이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
그건 그 두 사람이 결정할 일 아닐까요?
그것을 방해할 권리가 목사님에게 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대와 이 여인, 당신 둘은 서로에 대한
구역질나는 욕망에 불타고 있도다.
‘태생적으로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는
모든 헛소리에 속아 넘어가서
이런 역겨운 방식의
혼란스러운 삶의 대열에 합류하고..
(대사 까 먹었어요-_-;)
고린도 전서 6장 (정확히는 10절)에서 신이 말하길.
. 고린도 전서 6장에서 신이 말하길.. ‘동성애는 죄악이니라’
저는 어린이들이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단지 성경의 권위이외에는 그 주장의
근거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이죠. 반론의 여지가 없죠.
하지만 그것이 왜 그리 옳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 성경이라는 책의 기원을 생각해 보시면..
제 말씀은.. 작가는 대체 누구고 언제 쓰여 진 겁니까?
그리고 어떤 점이 그 책이 그토록 옳다고
확신하시도록 만드는 겁니까?
그게 제가 믿는 바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왜죠?
그건 제게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왜 믿지 않으시는 거죠?
증거가 없기 때문이죠.
지옥의 집은 종교적인 믿음이 사람들에게
(특히 어린이들에게) 작용하는 방식(위협)의
큰 문제점이 낳은 경솔한 결말인 것입니다.
미국의 신교 정통파들에 주도되어
극단적인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성경은 낙태와 가족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
샅샅이 검색 되어 그 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신의 말씀’을
수 천 년 간 인류가 이뤄놓은 발전에 대항하기 위해 .
사용하는 분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제 생각은 간음에 대한 처형은 인정되지만
누구에 의한 판단입니까?
목사님의 생각인가요?
아니오. 신약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럼 목사님은 간음에 대한 처형(돌로 쳐죽이는 것)
에 찬성하시나요?
저는 간음에 대한
국가의 처벌은
적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물론 좋은 책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윤리강령을
믿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가 믿고 살아갈 만한
윤리의 큰 틀을 제공하지 않던 가요?
글쎄요. 그렇지 않죠. 성경은 그 근원자체도
수상쩍고 비이성적이며
내부적으로 모순 투성이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문명화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윤리체계라는 것은
극도로 해로운 것이라고
확실히 느끼게 될 만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전 세계에 걸쳐
널리 설파되고 있으며
이 책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사상의 근원이 됩니다.
만일 너의 형제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혹은 아들이나 딸이
혹은 네가 사랑하는 아내가
은밀하게 ‘다른 신을 우리 뜻대로 섬기자’며
은밀하게 유혹하거든...
이게 바로 친구나 가족들에게 그들이
다른 신을 믿도록 제안할 경우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신이 내려주는
윤리강령입니다.
‘... 너희는 그를 죽여야 하느니라. 너를
다른 사람들에 앞서 죽이는 첫 공격을
네 손이 맡아야 하느니라.
돌로 쳐 죽일찌니라.. 너희는
야훼로부터 도망치려했으니..
너희들의 신인 야훼로부터..
구약의 신은 분명
모든 픽션의 등장 인물 중
가장 불쾌한 캐릭터일 것입니다.
질투심에 가득 차 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며,
좀스럽고 복수심에 불타며, 불공정하고
용서라는 것을 모르며 인종 차별주의자에,
인종 말살자에
그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대학살을
자행할 것을 계속해서 종용하니까요.
그럼 신이 바람직한 윤리적 규범을 제시 못한다면
누가 성경에서 그 일을 하죠?
아브라함일까요? 세계에서 가장 세력이 큰 3개의
주요 일신교 사상(유대, 기독, 이슬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그 분?
이 분은 자신의 아들인 아이작을 신에게 죽여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아니겠군요.
그럼 모세는 어떨까요? 이 사람은 ‘살인하지
말찌니라’ 라는 십계명이 든 석판을
신에게서 받은 사람 아닙니까?
바로 이 사람이 구약 ‘민수기(31장 18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정복한
미디안 민족을 자비롭게 대해주자
분노하여 이렇게 말 합니다.
그는 남자 포로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모든 여자들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해 살려둘 것이라’
이 모세의 이야기가
2차대전 중 히틀러의 폴란드의 강제점령이나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과 마쉬족의
대학살과 도덕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고로 모세는 제외시키도록 하죠.
성경에는 일상적인 윤리적 갈등을 겪게 되는
비교적 덜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아마 이들이 더 나은 역할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 까요?
구약의 ‘사사기(19장 22절-30절)’를 보면 한 성직자가
기비아에서 아내와 함께 여행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노인의 집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됩니다.
하지만 저녁식사 중 폭도들이 나타나
집주인에게
남자손님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강간(남색질)을 하겠다는 의미)
네. 성경의 표현법으로는 그렇죠.
그리곤 노인이 대답합니다.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 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즉, ‘내 딸을 마음대로 욕보여서
마음껏 즐기는 것은 좋지만
우리 손님, 결국은 ’남자‘ 손님이죠,
에게는 예의를 지켜라.’
이 괴상망측한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가졌건,
이 종교적 모임에서의 여성의 위치가 고작
어떤 것인 가를 확연히 진술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착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반발하겠죠.
‘구약이 심히 불쾌한 부분이 있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약은 그 상처를 치유해주고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었다’라고 주장합니다.
네, 물론 윤리적 견해로 보면
예수(의 행적)는
(구약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혹은 누가 그의 대사를 만들어 냈건 간에,
자신이 교육받고 자란
구약에서 그 행동윤리의 지침을 찾는 데는
만족하지 않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잘못되고 맙니다.
신약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사망한 후에 만들어 졌습니다.
원죄에 대한 불쾌하고
가학-피가학적인 고통에 대한 교리죠.
그 사상의 요점은 신이 스스로
끔찍하게 고통을 받고 처형당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고
예수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해준다는 것입니다.
그저 아담과 이브의 원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저지르게 될 모든 죄도 포함이
된다고 합니다.우리가 저지르기로
결심을 하건 말건 말이죠.
신이 우리의 죄들을 사해주기를 원했다면
왜 그냥 용서해주지 않는 겁니까?
도대체 신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겁니까?
뭐.. 짐작컨대 자기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하는 거겠죠.
자신이 판사고 배심원이며
처형의 희생양이기도 하니까요.
중요한 점은, 선사시대의 과학적인 견해로 본다면
원죄를 영속하게 만든 것으로 주장되는
아담은 어쨌거나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엉터리고 엉성하며 .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쾌한 이론의
전제를 약화시키는 서투른 스토리죠.
오, 물론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이야기였죠.
‘상/징/적‘
고로 예수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저지른 ‘상징적인 죄악’을 위해서
스스로를 고통 받고 처형당하게 만든 거로군요.
소위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판결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상한 신학과 의심스러운 책이
아무런 문제도 안 될 텐데 말입니다.
이런 사실만 없다면 말이죠.
세상에는 그런 얘기들이
정말로 신의 말씀이라고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들며,
진보적인 가치와 법률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말씀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좋은 책’을 문구 그대로
극단적으로 믿는다면..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하죠.
그럼 살인도 정당화 못 될 것이 없습니다.
1994년. Paul Hill 목사는
플로리다의 낙태 클리닉 밖에서
의사 존 브레튼을 총으로 쏴
살해 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에 폴 힐은 살인죄로
처형되었죠.
하지만 그는
당당히 사형대로 가면서 자신의 행동은
성경의 말씀대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죽었습니다.
저는
폴 힐의 친구이자 옹호자였던
마이클 브레이 목사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브레이 목사님?
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리처드 도킨스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마이클 브레이입니다
기독교인으로 브레이 목사는
대체 어떤 윤리적 근거로
스스로를 심판자라고 자임한
냉혈한 살인자를 변호할까요?
목사님의 친구인 폴 힐은 의사 한명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손으로
처벌을 가한 셈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뇨. 폴 힐은 그의 증언에 의하면
단지 자기방어적으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응징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것은 법률이 할 일이고..
법의 의무는 벌을 내리는 것이죠.
하지만 시민의 의무는 정말로..
서로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 살해당한 의사도 그의 죽음을 슬퍼할
아내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을 폴 힐은 죽인 겁니다.
폴 힐이 보호하려 들었다는 그 태아는
아무런 지식도, 기억도, 두려움도 없는
작은 존재일 뿐입니다.
완전히 성장한 의사가 가진 그런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이 양심의 가책이나 일말의 후회를
느끼게 하지 않나요?
저는 사람의 가치를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이나 .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우리가 부여하는 가치는..
역사적으로.. 또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들어 졌다고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모든 인간은 신성성을
지니고 있죠.. 그들이 저능아이건.. .
상식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브레이의 동료 성직자인 폴 힐은
매우 위험한 정신질환자로 비춰질 것입니다.
그가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더욱 심각하게 잘못된 짓’을 기꺼이 행할 만한
그런 사람 말입니다.
하지만 폴 힐이나 마이클 브레이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정당성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곤 성경을 절대적인 신의 말씀이라고
재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죠.
어떤 특정 성서를 믿지 않는
우리들의 다수는
그 고통에 대해 걱정합니다.
실제로 살인의 희생양이
목사님의 용어로는 태아이건,
성인 의사이건 말이죠.
그 둘.. 그 두 죽음간의 엄청난 불균형을
깨닫지 못하시나요?
저는 물론 그 사실을 염두에 둘 수는 있습니다
저는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고로 다양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모두 알 수는 없는 것이죠.
목사님은 지금 폴 힐이 (천국과 지옥중)
어디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폴 힐이 잘 지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은 폴이 천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의사를 죽인 행동에
찬성을 하셨다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는.. 음.. 예수님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듯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죠.. 따라서 폴이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구했다는 그 생각이 제게는 와 닿습니다.
저도 꽤 강한 도덕적 확신을 가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은
제 경우는 그 정도까지 확신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도덕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어딘가 가서
누군가를 죽일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요.
어떻게 그 지경까지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겁니까?
제 의견은.. 저의 개인적인 확신은
이런 때 제게 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더 그렇게 할 수록... 성경에 대해..
더 오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수록
더욱 내가 지적으로 만족한다는 것에 대해
다른 이들이 그런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저는 브레이 목사가
마음에 들더군요.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그 사람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문득 그 생각이 나더군요.
저명한 미국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가 했던 말입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론물리학자죠.
그는 이렇게 말했죠.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이다.
종교가 없으면
좋은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쁜 짓을 한다.
하지만 좋은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도록 만들려면 종교가 필요하다.’
마이클 브레이 같은 사람은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에 있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이 들의 사고가 다 성경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실제로 윤리의 영감을 바로 그 같은 책에서
얻고 있으니까요.
누가 옳은 것입니까?
현재 영국의 교단은 이런 성경의 해석을 놓고 생기는
상이점 때문에
심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낙태에 대한 논란은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닙니다만
동성애와 동성애자 성직자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한 쪽은 시끌 벅적한 성서 순수주의자들입니다.
반면 성경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좀 더 중도적인 입장을 지닌 종교인들도 있습니다.
주교님은 성공회의 좀 더
진보적인 입장을 지니신 분인데요,
다른 편에서는 아마도 성서적으로 진리인 것이
주교님에겐 진리가 아닌 것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교님은 제가 생각하는 바에
좀 더 가까우신 폭넓은 견해를 가지신 분이니까요.
확연히 성서적 근본주의자들의 그런 태도와는
다르실 텐데요.
동성애에 대한 주제에 대해 말씀을 드린다면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죠.
성경에 그와 관련된 몇 개의 텍스트가 있긴 하죠.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처럼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 동성애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몇 부분 있기는 합니다.
구약에서 특히 아주 강하게 주장되고 있고
신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옥스퍼드 교회 주교 리처드 해리스>
하지만 그것은 성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성경전체의 메시지나 예수님의 메시지의
전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텍스트만 고립시켜 놓고 봤을 때
그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태도가 문제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교수님의 진화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과 관련된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의 게이니 레즈비언이니 하는
성향에 대한 이해는 예를 들자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이 쓰여 진 로마시대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이제는 확연히 그저 선택의 문제인 것이죠.
이제 우리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보다는)
동성그룹에 속한 사람에게 주된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로 이것은
변화하는 진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론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의
그 잣대가 변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죠.
물론 주교님의 말씀은 제 귀에는
너무도 우호적으로 들립니다만
저는 이런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신 주교님이
왜 아직도 결국은 기독교에 매달려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아니면 다른 근본주의자들이 그런 말로
주교님을 공격하지나 않을 까 생각됩니다만..?
저는 중도주의자들은
종교적인 믿음과 이성적 사고에 대한
열정을 모두 간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열정적인 중도주의자라는
위치가 가능해지는 거죠.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이성을 저버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도적인 종교인은 이성과 종교적 신념 중
어느 한 쪽 만의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는 듯 합니다.
중도주의자의 위치는 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선별적으로 믿는 것이죠.
하지만 어느 부분을 말 뜻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느 부분은 그저 우화적으로 제시된 것인 지를
결정할 수 있는 걸까요?
성공회의 주교님으로 기적을 부인하시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지금껏 말씀해 오신 사실들과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물론 그러셔야만 하시겠죠
만일 신께서
늘 기적을 창조하고 계신다면
우린 전부 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풍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측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이성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겠죠.
그렇다면 주교님이 믿으시는 기적은
거의 최후의 보루로서 표현한다면 .
‘이성적 기적’을 초월한 것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우리는 기적이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벌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마다 기적이 항상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가 아는 방식의 인류의 삶은
있을 수가 없게 되죠.
그렇다면 좀 더 큰 기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모마리아의 처녀 출산같은..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 같은 사안과
같은 무게를 지닌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확신하며 그것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처녀출산을 믿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제게는 우리가
성경의 일부분의 말은 들어야 하고
일부는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윤리적인 질문에 이르러서는..
왜 그 책에서 괜찮은 것만 선별해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 중에서 오늘 날의 사회에 있어
좋고 나쁜 것을 가려 낼 능력이 있다면 .
왜 성경 때문에 이리 골치가 아파야 하는 거죠?
(우리의 판단력을 믿고 그냥 무시해버리면 될 일을)
종교는 단순히 지금이 아닌
훨씬 더 오래된 예전 도덕 개념이라는 숙주에 사는
‘기생충’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의심됩니다.
저는 과학이 인간윤리의 진정한 근원을
어떻게 밝혀 내고 있는 지를 검증하고 싶습니다.
가공된 신의 텍스트에서의
도덕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의 진화과정에서
자연 선택적으로 발전한
이타적인 유전자로서 말입니다.
사회적 욕구에 있어 인간은
침팬지나 다른 개체에 비해 훨씬 더
고상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것만 언제 단 번 혁명적으로
발전한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침팬지가 MS-DOS면
인간은 윈도우 2000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종교인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들의 신과 성스러운 경전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내면의 통찰력을 주었노라고.
하지만 그런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좋은 일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확실히 훨씬 더 도덕적이지 않습니까?
신에게 아첨하는 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선악에 대한 진정한 의식은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인간성 자체에 친절함과 자선심리,
관용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윈의 진화론적인 설명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선사시대의 대부분을 통해서
인간은
이타적인 유전자가 선호되는 환경에서
살아 왔습니다.
우리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 중요한,
그리고 우리의 집단 구성원과
상호 관계에 유리한 유전자의 생존 때문이죠.
그건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종교적인 방법으로 윤리의 근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방해가 될 뿐입니다.
올리버 커리 (진화생물학자)
윤리는 종교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죠.
인간은 선천적이며 잘 조직된
윤리의식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침팬지나 다른 개체에서 관찰되는
사회적인 본능의 좀 더 고상한 버전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럼 침팬지의 집단에서는
어떤 형태의
원시적인 윤리의식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우선 그들은 가족집단으로 모여서 삽니다.
어미는 자식들을 돌보고
함께 팀으로 행동을 하죠.
그리고 침팬지는 특히
‘사회봉사’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매우 치열하게 벌입니다.
그저 힘을 통한 경쟁이 아니라
훌륭한 리더 역할을 하고.. 동료들 사이의
논쟁을 중재하여 합의시키는 능력을 보임으로서..
그럼 우리가 협동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성향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함께 행동하는 것이 거기에 가담한
구성원 상호간 이득을 낳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혼자 무엇을 하는 것 보다는 함께 그룹을 지어
하면 아무래도 더 나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죠.
아마 옳고 그른 것을 일러주는
성스러운 책이나
교황이나 호메이니 같은
종교지도자가 없어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놀라울 정도로 널리 공감되는
윤리적인 교감을 안정적으로 지니고
사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우리의 유전적인 본성일 것입니다.
사회적 동물로써
우리들은 살인하거나 강간, 절도가 용납되는 사회에
살기를 원하지 않는 다는 것에는
공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종교 없이도 도덕적인 인식이 있고
상호간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계속적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있건 없건 우리는
모두 공통적으로 변화해 왔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지속적으로 변화해왔습니다.
50여 년 전에는 영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인종차별 주의자였습니다.
이제는 소수의 사람들만 그렇죠.
50년 전에는 동성애자들이
길거리를 손을 잡고 활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전혀 어렵지 않죠.
우리들 중 일부는 발전하는 (혹은 변화하는)
윤리규범에 뒤쳐져 있기도 하고
일부는 그보다 앞서 나가기도 하죠.
하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들 모두의 윤리관은
성경의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의 윤리관이나
모하메드나 사도 바울의 시대의 윤리관보다는 앞서 있습니다.
발전적인 변화는 종종 종교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 발전은 향상된 교육수준과
신문 사설,
TV연속극,
의사당의 연설내용,
사법판결,
그리고 소설들에 의해 주도 되어온 것이죠.
제 생각으로는 우리의 의식은 뇌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전제가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언 맥키언 - 극작가)
그런 전제가 있다면, 뇌가 존재를 멈추면, .
즉 기능이 정지해서 부패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의 삶의 마지막이 되는 것이라는
충분한 이성적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죠.
그런 사고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 되는 겁니다. 특히 도덕적인 면에서 말이죠.
우리는 그 짧은 순간의 ‘의식’이라는 것을
소유하는 훌륭한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죠.
따라서 그 특권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죠.
무신론자들은
기독교인들이나 회교도들이 그러하듯이
현세가 아닌 그 밖의 다른 추구의 대상으로서의
낙원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더 더욱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려고 들지 않죠.
우리는 이성의 훌륭한 선물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이들이 커가면서
자라나는 것을 관찰할 수가 있죠.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마음과 정신이 존재하며 그들의 감정도 ..
자신의 것 만큼이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능력이죠.
이런 공감이라는 선물이야 말로 우리의 도덕체계를
세워주는 근본적인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경전에 새겨진 문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맥키언씨 말씀에 마음속 깊이 공감합니다.
종교에 대해 늘 올바르지 못하다고
제가 느껴온 점중의 하나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아닌 해답에
그냥 만족하고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만일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하늘의 신과 당신과의 관계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경전이 있다면..
그건 단순히 호기심을 제약해버리는 것이 되죠.
세상에 대한 경외심의 원천과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제 느낌으로는 회교건 기독교건 주요한 종교들에 있어 분명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주요한 종교들에 있어 분명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Ian McEwan 같은 무신론자에게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사랑하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신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신론이라는 것이 그런 허탈감
(절대적 존재가 없다는 공허함)의 원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내세에 대한 생각을 부정함으로 인해
우리는 현세를 훨씬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라는 시간과 지금의 우리의 위치라는 것은
언젠가는 닥치게 될
영원한 축복이나 저주를 위해
인내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과 우리의 위치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전부이며
그것을 최대한 잘 활용하려는 정신이
우리의 재산인 것입니다. (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고로, 무신론은 종교는 절대로 만들어 줄 수 없는
긍정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철학인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자연은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존재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탐험을 하고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것에 대해 단지 수박 겉핥기 식의,
결국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해답만을 던져 줍니다.
반면. 과학은 진정한 해답을 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우리의 세계의 그 복잡함 뒤에 숨겨진
진정한 웅장함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하죠.
“분명히 이 세상과 이 삶 이외에 무언가가 더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이상 더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행운아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 죽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성공적으로 태어났더라면 지금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갈 수도 있었던
사람의 숫자는 아마 사하라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숫자보다 더 많을 겁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배열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과 저는 정말이지 징그러울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죠.
우리를 지금 이곳에 있게 하기위해 일어났어야 할
수 많은 경우가 모두 다 들어 맞아서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살아있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있는 지금의 이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역/자막: 김기현 (네이버-베쑤선생
디시인사이드 - 눈먼시계공)
wish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