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지 - 안성 남사당 여성꼭두쇠 바우덕이 (사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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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노다지에 소개된 바우덕이
홈페이지 http://www.baudeogi.com


 

은 조선 후기에 장터와 마을을 떠돌아 다니며 곡예, 춤, 노래를 공연했던 집단으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다. 발생 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때이며, 남사당패가 시작된 곳이자 전국
남사당패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50여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단체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나귀쇠, 저승패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구성원은 자발적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생활이 곤궁한 집에서 아이를 맡긴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남사 당패에서 아이들을 훔쳐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 내용을 정하여 기예를 연마하였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다니면서 풍물놀이, 줄타기, 탈놀음,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등을 공연하였다.

이들은 노비보다도 더 천한 신분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떠돌 아 다니면서 근근이 끼니를 때우는 생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예쁜 사내아이들과 여자들이 몸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다가 19세기 말에 여자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지만 기예가 매우 출중했던 바우덕이가 안성 남사당패의 대표인 꼭두쇠가 되면서 남사당을 최고의 민중 공연예술단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있었는데 ‘바우덕이’의 안성 남사당패가 신명나는 공연으로 노역자들을 기쁘게 하여 경복궁 중건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흥선대원군은 노비보다도 천한 남사당패에게 당상관 정3품 (지금의 도지사급) 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하였다고 전해온다.

이렇게 하여 조선 왕조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은 남사당패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민중예술단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이 후 일제의 침략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그 명맥마저 끊길뻔한 시련을 겪에 된다.

그러나 바우덕이 이후에도 남사당의 근거지이자 생활터전이었던 안성에서 남사당의 후예들이 안성과 서울을 중심으로 남사당의 전통을 끈질기게 이어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남사당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지금은 2001년도부터 해마다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를 기리고 남사당 문화를 세계적인 대표문화로 전승 발전시키고자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축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 당시 5세 )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상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1870년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최초의 연예인:남사당 바우덕이

  폐병으로 사망(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골짜기에 묻힘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후기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자로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어 남사당패를 이끌던 사람이다. 1848년 안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1853년 5세의 어린나이에 안성 남사당패에 맡겨져서 노래, 줄타기, 악기연주, 살판 등 갖가지 기예를 익혔다.

바우덕이는 어려서부터 줄타기, 살판, 노래, 풍물놀이 등 남사당 놀이의 모든 기예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와 함께 공연을 나가면 관람객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받았다고 한다. 안성 남사당패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벌어들이는 수익도 늘어나는 등 남사당패 내부에서도 바우덕이의 존재 가치는 더욱 커졌다. 바우덕이가 15세가 되었을 때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던 꼭두쇠가 연로하여 새로운 꼭두쇠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어린 바우덕이가 모든 단원들의 만장일치로 꼭두쇠로 선출되었다. 당시로서는 나이가 15세밖에 안되었고 더군다나 여자의 신분으로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우덕이의 뛰어난 예술적 소질과 공연장에서의 스타성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후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2년(1865) 흥선대원군이 안성남사당패를 불러들여 경복궁 중건 사업에 지친 노역자들을 위로하였는데 최고의 공연을 펼쳐서 노역자들을 기쁘게 해주었고 흥선대원군은 감사의 표시로 당상관 정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하였다. 이때부터 안성 남사당패는 전국 남사당패와 모든 놀이패의 최고 우두머리 단체로 활동하였으며, “바우덕이패가 왔다. 바우덕이다”와 같이 “바우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때부터 대한민국 연예가 발생한 시점으로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연예인을 그래서 “바우덕이”라고 평가한다. 바우덕이는 이후로도 전국을 다니며 남사당이라는 천한 놀이문화를 대중공연문화로 발전시켜 백성들의 억눌린 한을 풀어 내리고 위로하는 활동을 지속하다가 힘든 유랑 생활 속에서 폐병을 얻게 되고 1870년 23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다. 남사당패가 바우덕이의 주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에 바우덕이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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