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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인이 어린아이를 줏어다가 10년을 키워서 자신과 결혼을 하려고 한다....
이 소녀는 세상과 격리되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노인에 대한 감정이 없지는 않은듯 하다...
하지만... 어느날 나타난 대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무슨 미저리같은 내용이냐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어때...-_-;;
얼마전에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나이든 40대 노총각이 고등학생을 납치해서 집에 가두어 두고, 평생 살려고 했는데, 여학생이 기지를 발휘해서 탈출했다는...
누구나 사람의 마음속에는 저런 바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쁜 여자를 잡아다가 집에 가두어 두고, 나만 밖에 다니면서... 집에 와서 귀여워해주고...
뭐 간혹 영화의 소재로도 이용되고, 간혹 엽기적인 사고라고 방송에 나오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냥... 도덕과 양심사이의 문제일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저런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간혹 그런 공상은 하면서 살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내 자신의 양심도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얼마전에 읽었던 앗살람 아라비아라는 이슬람여행기를 읽다가 보니까... 그쪽에는 아직 이러한 비슷한 풍습이 남아있는것 같더군요... 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것이 합법이라면...^^;;
암튼 세상이란 그 사회에서 규정한 도덕과 내 자신이 결정한 양심속에서 살아가는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저런 비인간적인 노인의 행동에 대해서 약간의 변병을 해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중에 소녀와 결혼날짜를 혼자 잡아 놓았는데, 그 날을 기다리지 못하겠고, 소녀가 점점 다른곳에 신경을 쓰자...
하루에 하나씩 표시를 하던 달력에 하루에 일주일치... 나중에는 달력을 뜯어버리는 노인의 눈에 보이는 욕정에 씁쓸한 생각도...
암튼 잔잔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해주었던 괜찮은 영화입니다...
예전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촬영지만은 못하지만, 을왕리쪽에서 배 한척을 뛰어놓고 찍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자주 흐르는 해금 음악은 제가 좋아하는 강은일씨의 연주라고... 영화끝나고 찾아보면서 그럴줄 알았읍니다...^^;;
마지막으로 엔딩에 멋진 말이 나오더군요... 마치 연어의 일생이 생각나는 엔딩으로 잡설을 마칩니다.
팽팽함에는 강인함과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죽을 때까지 팽팽한 활처럼 살고 싶다 | |
다시 태어나려는 김기덕 감독의 다짐, <활>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김기덕의 열두 번째 영화 <활>을 보았다.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은 마지막 자막에 있다. 물론 김기덕이 마지막에 자막을 처음 쓴 것은 아니다. 이미 <해안선>부터 그는 무언가 영화가 끝난 다음 거기에 서명을 넣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 말은 “팽팽함에는 강인함과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죽을 때까지 팽팽한 활처럼 살고 싶다”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빈 집>의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가 읽었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다. 혹은 <해안선>의 마지막에 쓰여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합니다”와 같은 호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성어나 경구 혹은 테마나 주제, 아무리 양보해도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김기덕이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읽힌)다.우리를 증인으로 내세운 고통스런 자작극
노인의 결혼식을 5월12일로 정한 까닭은?
오직 바다만이 유일한 실재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차라리 활이 아니라 오히려 바다이다. 이 영화에서 바다는 그저 거기에 있는 장소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바다는 커다란 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그 배에 살고 있는 노인과 소녀라는 거의 비정상적이거나 비일상적인, 혹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 설정에서 오직 바다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대상이 되어 죽었을 때, 소멸되었을 때, 부정되었을 때, 이 환상에 침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커다란 물이 거기서 어떤 심연처럼 배를 집어삼킨다. 마치 허기진 것처럼 그 배를 먹어치운다. 그런 다음 다시 고요해진다. 구름도 없는 하늘과 파도가 없는 바다(오직 단 한번의 비바람에 의한 출렁거림이 있지만 그 장면이 밤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그 평면적 공간은 모든 이미지의 제로이다. 제로의 실재. 김기덕이 점점 더 침묵에 빠져들면서(<나쁜 남자>에서 <봄…그리고 봄>을 거쳐서 <사마리아>와 <빈 집>에 이르는 화면의 벙어리 효과) 이미지에 매달린 것을 생각할 때 이 평면의 제로 공간 위에 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미학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다. <활>이 내게 신기하게 보인 가장 큰 이유는 김기덕이 모든 이미지를 버리고 좁은 배 안에서 (이제까지의 그 자신의 영화에서의) 행위(의 반복)에 집중하기 위해서 바다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는 종종 김기덕이 만들어낸 명상하는 듯한 이미지가 없다. 다만 행위(의 반복)만이 있다. 그 행위에 대해서 바다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바다는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상황의 절대성이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실재의 공허. 혹은 이 영화에서 공허 위에 세워진 설정을 채우기 위해서 왜 발췌라는 반복이 중요해졌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기덕은 여기서 이제까지 자기가 보여준 것을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반복을 다한 끝에 노인은 그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다. 그런데 (김기덕의 다른 영화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다른 반복과 달리 노인의 죽음은 (<활> 안에서) 자살의 몸짓을 한번 연출한 다음 정말 자살한다. 물론 반복과 죽음이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반복이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선택 중에서 반복을 택할 때 그것은 근본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첫 번째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은 그것의 긍정이지만, 같은 것을 두 번째 선택할 때 그것은 같은 것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과정을 꼼꼼하게 다시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활>은 처음에는 그 균형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소녀가 소년과 함께 떠나려고 할 때, 이미 점괘는 소년과 함께 떠나야 한다는 예언을 한 다음, 노인은 떠나가는 배에 매달린 줄을 자기 목에 걸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생각으로 떠나가는 배를 본다. 그런 다음 배가 떠나가고, 자기 목에 걸린 그 줄이 “팽팽하게” 노인의 목을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노인은 허둥지둥 더듬거리면서 칼을 찾아 그 줄을 끊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그 장면은 물론 <악어>의 용패가 보여준 그 마지막 장면의 반복이다. 나는 사실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그 자신의 첫 번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반복. 이 발췌의 반복에 어울리는 결말. 그런데 좀 놀랍게도 그걸 알고 소녀는 배를 돌려 노인이 남겨진 배로 돌아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갑자기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난 다음 김기덕은 길고 느리게 노인과 소녀의 혼례장면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활>은 이 장면의 앞과 뒤,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이지만 노인이 소녀의 떠나가는 배에 목을 매다는 순간 반복은 끝나고 사실상 이 영화에서 가장 지루하지만 동시에 <활>에서 정말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늦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반복의 중단과 새로운 기회의 프로젝트.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인과 소녀 사이의 중재자로 등장한 소년이 문제가 된다.김기덕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등장인물, 소년
이제 소년, 소녀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그리고 비로소 (혹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여기서 발췌의 반복이 갖는 의미를 생각한다. 더도 덜도 없이 노인은 나이 든 용패(<악어>), 혹은 현식(<섬>), 늙어버린 지흠(<수취인불명>), 지쳐버린 한기(<나쁜 남자>)의 그 누군가이다(여기에 더 많은 이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김기덕의 몫이다). 혹은 그 모두이다. 그 노인에게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청하게 할 때,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 그래서 결국 유령연습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유령과 싸우는 <해안선>, 하지만 무엇보다도 <빈 집> ‘이후’), 그 자리에 구원의 약속으로 소년을 불러낸 다음, 그에게 기꺼이 그 다음을 맡긴다. 그것은 부채를 떠넘기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소망, 혹은 다시 시작하려는 다짐이 있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에서 읽은 다짐에서 그 소망을 본다. 김기덕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우리에게 다짐한다. 좀더 유머를 가질 수 있다면 <활>은 <사마리아>의 소년 버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제 소년, 소녀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운전을 가르쳐주었고(<사마리아>), 소년은 노인으로부터 소녀를 책임져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활>). 이제부터 이 소년, 소녀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아야 한다. 소년, 소녀들의 신세기. 혹은 세상 안으로의 악순환의 반복. 소년, 소녀들은 다시 한번 지옥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그 안에서 소녀는 아버지 없이 세상 안으로 운전해야 한다. 혹은 소년은 노인의 도움없이 소녀를 돌보아야 한다. 이제 소년이 노인에게 질문했던, 폭로했던, 요구했던 그 모든 말은 고스란히 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디니. 혹은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두번의 간절한 거듭된 부름. 그리고 질문. 여기에 대한 침묵. 예루살렘의 저 오래된 비밀.글: 정성일 | ||||||||
감 독 : 김기덕 | ||||||||
주 연 : 전성환 , 한여름 , 서지석 | ||||||||
각 본 : 김기덕 | ||||||||
촬 영 : 장성백 | ||||||||
음 악 : 강은일 | ||||||||
편 집 : 김기덕 | ||||||||
미 술 : - | ||||||||
장 르 : 드라마 | ||||||||
개 봉 : 2005년 05월 12일 | ||||||||
등 급 : 15세 이상 관람가 | ||||||||
시 간 : 90 분 | ||||||||
제작/배급 : 김기덕 필름 | ||||||||
제작국가 : 한국 | ||||||||
제작년도 : 2005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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