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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라는 것은 무엇일까?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을 불면의 밤을 보내게 했던 질문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극단적인 수용소의 삶에 처해있는 본인과 타인의 모습을 통해 진정으로 인간이 찾아가야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란 일률적인 보편타당한 정의로 내려질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운명이라는 화두를 사용한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라기 보다 스스로 엮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즉, 삶의 수많은 자극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 있다고 말한다.
"삶에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고통과 죽음에도 틀림없이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라고 남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목적은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목적이 요구하는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삶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리 굴욕스러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왜'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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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제목의 책인데, 번역자만 다른듯한 책인듯 합니다.
<미디어 리뷰>
저자 : 빅토르 프랑클 |
오스트리아 빈 대학 정신의학 교수를 지냈으며, 실존분석적 정신요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하여 정신의학의 새 장을 연 학자이다. 그는 모두 32권의 책을 썼고, 전 세계 대학으로부터 29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클 박사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수년 동안 수감되었었는데, 이 때의 체험으로 인해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수용소 체험과 거기서 비롯된 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전 세계의 지성을 감동시켰으며, 26개 국어로 번역되어 9백만 부 이상이 팔렸다. 프랑클 박사는 1997년에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정호의 정리>
사람이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고통 자체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삶의 의지를 북돋우지는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삶은 고통이며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와 만나게 된다. 삶에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고통과 죽음에도 틀림없이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라고 남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목적은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목적이 요구하는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삶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리 굴욕스러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 니체
아무리 가진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슴 깊이 간직할 수만 있다면, 비록 짧은 순간에 그칠지라도 구원의 빛이 찾아든다는 걸 뼈저리게 이해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수용소에 갇혀 아무 뜻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올곧게 고통을 견뎌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전무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가슴속에 간직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텅 빈 공간에 가스를 주입하면 가스는 공간이 크든 작든 그 공간을 구석까지 균일하게 채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통도 크건 작건 간에 사람의 의식을 가득 채우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고 좌절감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제수용소가 다른 건 다 강탈할 수 있어도 인간이 가진 마지막 자유, 즉 어떤 주어진 상황 하에서 또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유만큼은 건드릴 수 없다.
결국 한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이 내린 내면적 결정의 결과이지, 수용소 생활에서 받은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아무리 열악한 수용소 안에서조차도 전형적인 수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성을 지켜나가는 수감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하나, 내가 고통을 겪을만한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엮어나갈 수 있는 기회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무릇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고통에도 의미가 없을 수 없다. 운명과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듯 고통도 반드시 거쳐야 할 삶의 한 과정이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성숙시킨다.
나를 짓누른 고민은, 우리를 둘러싼 그 고통과 죽음 자체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겪은 고통과 죽음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도 헛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요행히 빠져나오느냐 못 나오느냐에 의미의 존폐가 걸려 있는 그런 삶, 우연히 베풀어지는 은총에 기대는 그런 삶은 살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것이, 나의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허물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전문가들이 열거하는 심리적인 원인보다는 본인의 자의적 선택에 따른 것이다. 수용소 세계의 영향력을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 자신의 내면을 단단히 장악하지 못한 사람이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된다.
현실을 외면하면 그만큼 공포도 줄어든다고 했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싼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실을 깡그리 외면한 사람은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무너졌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헛수고로만 보였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참담한 상황이 도리어 내적으로 자신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수용소 생활이라는 외부적 난관을 내부 단련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고, 과거의 삶 속으로만 자꾸 숨으려 했다. 그런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던 수감자 생활을 오히려 절정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지 못했다.
인생은 이빨 치료와도 같다. 사람들은 가장 아픈 순간이 이제 오려나 저제 오려나 가슴을 졸이지만, 그 순간은 어느새 지나가 버린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뚜렷한 개념으로 파악하는 순간, 더 이상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 스피노자
사람은 모진 현실 속에서도 미래를 향한 목표 의식을 잃지 않을 때에는 정신적으로 꼿꼿이 버틸 수 있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이런 시도를 한 수감자는 꽤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버팀목은 주로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나왔다.
반면에 미래가 없는 사람, 자신의 미래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수용소에서 낙오자가 되었다. 미래를 잃는다는 건 정신적 장악력의 상실을 뜻했고, 그런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개 그런 일은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왜 사는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틈나는 대로 자꾸 강조하여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고,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정신적으로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삶의 목표가 없고, 삶에서 아무런 내용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고통을 견뎌내야 할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이내 허물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지금까지의 자세에서 벗어나 오히려 우리 자신을 매일같이 아니 매 시간마다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삶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고민이나 말장난이 아니라 행동으로 답을 해야 한다. 삶이 요구하는 올바른 답은 올바른 처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은 두루뭉실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뜻한다. 따라서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내용도 아주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구체성의 요구 때문에, 누구에게나 단 하나밖에 없고 어느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 곧 운명이라는 화두가 등장한다. 어떤 인간도, 어떤 운명도, 다른 인간 혹은 다른 운명과 비교될 수 없다. 동일한 상황이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이 바뀌면 행동도 달라져야 한다. 구체적 상황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엮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삶의 의미에 눈뜬 사람은 이제 수용소 생활의 처절한 고통을 자기 내부에서 억누르거나 지우려 하지 않았고, 과소 평가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 들지도 않게 되었다. 그는 근거 없는 싸구려 낙관주의에도 빠져들지 않았다. 시련 앞에서 그는 의무감을 느끼게 되었고, 시련에 깃들인 깊은 뜻을 외면하지 않게 되었다. 시련은 곧 성취의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해치워야 할 시련이 많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스러운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말고 똑바로 응시할 수 있어야 했다. 설령 감정이 북받쳐 올라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을지라도...
그러나 눈물 흘리는걸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눈물은 그가 시련을 견딜 수 잇는 용기를 가졌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물로 씻어 내렸지 뭐..."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또 이 세상 모든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이 유일무이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적용이 되며, 창조적인 작업에도 적용이 된다.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때,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자기를 기다리는 저술 활동 혹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인생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의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시련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스스로 선택한 과업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자세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긴장을 무작정 쏟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기 삶의 잠재적 의미를 묻고 깨닫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당신은 첫 번째 인생을, 형편없이 행동함으로써 망쳐버렸는데, 이제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 지난번의 과오를 지금 막 다시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
고통은 그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가령 자기 희생과 같은 어떤 의미를 찾아내게 되는 순간 어떤 면에서는 더 이상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다.
정말로 중요한 건 머리 속의 생각을 종이에 그냥 적어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들의 고민은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살아나가지 못한다면 지금의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하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이 모든 고통, 바로 코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이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금의 고통스러운 현실 자체에 의미가 없다면 살아 나간다고 해서 의미가 생기는 것일까. 누구는 요행히 달아나서 의미 있게 살아가고 누구는 재수 없이 붙들려서 무의미하게 죽는 게 삶이라면, 그렇게 삶의 의미가 완전히 우연에 농락 당하는 것이라면 그런 삶이란 전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상황의 노예도 아니고 운명의 허수아비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상황에 굴복할지 상황에 맞설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언제나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
모든 인간은 어느 순간에든 전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말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전체의 일부분이며 진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책임이다. 책임이 수반되지 않은 자유는 방종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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