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가 세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도 못받고 살다가, 먼곳으로 시집을 보내진 그녀... 도망갈 궁리만 하다가 매실에 끌려서 남게되고... 잘나가는 밤농사가 광산사업으로 파산한후에 매실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그녀...
이미 폐인이 된 남편과 아버지를 뒤로한채 사업에 전념하는 그녀...
아들을 데리고, 피나는 고생을 하고, 미국으로 가서 안가본 골목이 없다고 말할정도로 발로 뛰고, 정성이 담긴 제품을 만들어서 현재 연간 세금만 2-3억을 내고 있다는 그녀...
처음에는 낮설었는데.. 보다보니 예전에 성공시대에 나온 사람임을 알았다.
연구개발분야에서는 좀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은듯하지만... 사업에 대한 집념과 영업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발로 뛰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의 고생담... 그리고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는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그래.. 나도 그녀처럼.. 아니 그녀를 능가하게 노력을 하자.. 그러면 될것이다. 또 안되면 어쩔꺼야.. 다시 일어나면 되지..
파이팅이다!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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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실과 한평생을 살아온 그녀
매실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식품제조업체로 지정받은 <청매실농원>회장 홍쌍리. 매실 하나로 새농민상, 국무총리상, 석탑훈장,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97년에는 식품 명인 1호로 선정되었고 신지식인으로까지 뽑힌 여인이다. 매실의 효능이 알려지기 전부터 20년이 넘게 매실을 식생활과 연관시키기 위한 연구에 매달렸던 홍쌍리 회장.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그녀의 연구가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매실식품이 되어 세상에 나가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매실의 나라 일본에서도 그녀의 매실식품을 수입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아낙 홍쌍리가 매실의 명인이 되기까지 ... 굵은 손 마디마디마다 숨겨져 있는 그녀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 매실, 내사랑!
도시처녀 홍쌍리는 45만평의 밤농사를 짓던 시골만석군집 큰며느리로 시집온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속에 눈물로만 지새던 그녀는 도망갈 궁리만을 한다. 그럴 때 그녀를 집에 붙들어둔 것은 다름아닌 매실이었다. 봄이면 제일먼저 꽃망울을 띄우고 여름이면 한아름 열매를 쏟아내는 매화나무밑에서 시름을 달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매실이 손의 더러운 때와 개밥그릇의 찌든 기름기까지 깨끗하게 빼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식중독에 걸린 자신이 매실고(엑기스)를 먹고 낫자 점점 매실에 빠져든다. 그래서 그녀는 밤나무를 베어버리고 매실나무를 심는다. 돈이 되는 밤나무 대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매화나무를 심자 시아버지의 호통은 계속되지만 홍쌍리의 매화나무에 대한 고집은 꺾지 못했고 지금의 매실농원을 이룰 수 있었다.
▒ 열중하라
매실은 그 맛 때문에 바로 먹을 수 없어서 다만 한방에 쓰이던 약용과실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쌍리는 매실을 밥상에 올리겠다는 욕심을 낸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 전혀 안 맞는 매실을 식품으로 가공하는 것은 기존에 알려진 방법도 없었고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녀가 시도한 첫번째는 매실을 6쪽을 내어 설탕에 저리는 일. 저려져서도 사각사각하면서 그 맛과 향이 더해지는 설탕의 적당량을 찾기위해 낮도, 밤도, 새벽도 없었다. 오직 매실연구 하나에만 몰두하는 세월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쓸데 없는 짓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매실에 미친 수십년의 세월 끝에 이제는 매실을 이용한 엑기스, 차, 절임, 장아찌, 정과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매실식품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 내 음식은 작품이다
그녀의 매실음식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후한 인심덕이었다. 그녀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자신이 만든 음식을 아낌없이 나눠줬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팔라고 손님들의 성화가 일고 쌍리역시 이왕이면 정식식품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허가가 잘 나지 않자 직접 군수를 찾아가는 당찬 기세로 제조식품 허가는 물론 전통식품지정의 기쁨까지 누리게 된다. 빚을 내어 공장을 세우면서도 매실식품을 사람들이 알아줄까 하는 걱정에 쓰러지기도 몇 번. 하지만 그녀의 매실식품은 입소문을 통해 점점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유기농, 항아리에 저장하는 방법으로 전통의 맥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는그녀는 국가지정 명인 1호가 된 영광과 함께 매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출처: MBC 성공시대 99/7/11
매화밭을 가꾸어오는 동안,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 부르기 시작한 이 노래는 아름답지만 그녀에게는 한이 맺힌 노래다.
"아버지 바지가랭이 움켜잡고 아버지, 대 잘 이을께요. 아버지, 명예 손상 안시킬께요. 제발 저 하는 대로 봐주십시오. 그래도 안 된다 이거야. 일꾼들 굶겨죽일 일 있냐면서... 그래서 내 술집요부만 요부가 생각하면서, 아버지 머리 감겨 드리고, 여름에는 등물 받아 드리고, 손톱 발톱 깎아드리고, 저녁에 팔다리 주물러 드리면서 이 노래를 불러 드렸어요."
그래서 꼬박 6년이 지났다.
보리가 살랑살랑 불어대는 저 언덕위에 아버지 묵으시던 거처가 있었다.
그 위에서 매화꽃밭을 내려다보면서 시아버지 말씀하셨단다.
"야야, 내 신선이 된 기분이네. 왜 내가 니를 그렇게 말렸을까.
너는 그런 머리가 어디서 나서 그런 의견을 냈노."
그러다 남편이 광산에 손을 대 3년 만에 파산하고 좋은 산은 모두 팔아 빚 갚고, 나머지 악산만 남기에 이르렀다.
악산은 그나마 팔리질 않았다.
그때가 71~ 73년 때다.
그때 여사의 일기장을 보면 1700만원이라는 빚이었는데 논 4마지기에 35만원 할 때였다. 그때가 가장 막막하고 힘든 시기였다.
" 그래도 그때는 내 혼자 안된 것, 과부소리 안 듣는 게 너무 좋은 거야. 왜냐면 빚쟁이들이 몰려와 우리 남편 맨날 술 마시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고만
있는데, 그야말로 화병이 걸린 거지. 그래, 산소 호흡기로 사는 거야. 숨도 못 쉬고. 영감은 이쪽에 눕고 나는 저쪽에 누워서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데 그때 내가 정신을 차린 거지."
새벽 5시에 후레쉬 집어 들고 일꾼들한테 가서 그랬다.
"아재, 우리 일좀 해주이소" 그러면 " 여자가 새벽 부터 재수 없구다" 그랬다.
몇 달 전만해도 수야엄마 일 잘 해주던 사람들이 말이다.
그래서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군복 바지 두 벌 사서 입고 머리 짧게 깎고 모자 쓰고 산으로 일하러 갔다.
일꾼들 앞에서 수야 엄마는 그들을 앉혀놓고 패션쇼를 했다.
"아재들, 내 모습 어때요?"
그러면 " 꼭 상이군인 같다" 그랬다.
그러면 홍쌍리는 "오늘부터 나를 남자로 봐주십시오. 재수 없다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이 일을 안 하면 안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수야엄마, 그렇게 속을 털어놓자 드디어 일꾼들이 이해를 해주기 시작했다.
몸이 아플 때 목발을 짚어가면서도 꼭 일꾼들 앞장을 서서 이것저것 참견하고, 일을 마무리 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산엘 오르고, 그렇게 일을 했다.
속으로 5년만 기다려라. 내가 5년 뒤면 빚을 다 갚는다면서 말이다.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웃기라도 하면 동네 사람들은 그 많은 빚을 지고도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웃다가도 마을 사람 만나면 입을 막고 그랬다.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열매 열리는 25일을 위해 1년을 기다려 그 기간동안 매실실습을 한다.
그때는 설탕도 귀해 소금으로만 연구했다. 촌에 무슨 설탕이 있었으리라.
계속 실패의 연속이었다.
시어른이나 남편은 금이 나오나, 은이 나오나 하면서 쌓아놓은 열매를 갔다 버리곤 했다. 그럴 때 마다 말리며 '울어매' 찾으며 울고불고 그랬다.
"이듬해가 되면 안해야 될 것인데 자꾸 하고 싶은 거야."
그것을 28년동안 했다.
개발한 식품은 주변사람들에게 "배아프면 이거 먹어봐라, 술 먹고 나면 참 좋다, 육식 먹을 때 이것 먹어봐라"하면서 개발하고 주변사람들 나눠주며, 퍼주는 것으로 보람을 샀다.
시아버지 때문이었다.
"시집오니 우리집이 인간종착역이 돼있는 거야" 오갈 때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다 감싸 안았던 시아버지. 그래서 죽은 사람 제사 지내주고, 부모 없는 사람 호적에 올려 결혼시켜주고 결혼하고 나서 혼자된 사람 거들고… 지금까지도 그녀는 그렇게 인간울타리가 되어 퍼주는 사랑을 시아버지 따라 베풀고 있었다.
" 내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 사시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던 거야. 그렇게 나눠 먹은 것이 오늘의 내가 있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도 며느리한테 그런다. 이 세상 다 안을 수 있는 인간울타리가 되라고.
그러다 좋은 군수를 만나 매실을 전통식품으로 인정받기에 이르고 공장도 세워 상품화에도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남들 퍼주기만 하지 말고 상품화 시켜 상표를 달고 판매해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젤 처음에는 독에 담기만 해놓고 어떻게 파는지 몰라 누가 사러 오면 우리 영감님이 오토바이 타고 하동에 쫓아가 꿀병 하나 사와가 주는 대로 받았어요. 무조건 한병씩 퍼주고 그랬어요. "
벚꽃축제, 함평나비축제 등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을 보고 홍쌍리 여사는 생각했다. "매화가 이렇게 이쁘게 피었는데,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사람을 오도록 만들자" 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곳에 와서 매화를 눈으로, 입으로 즐기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매화밭을 찾도록 매실밭을 꾸준히 일궈나갔다. 그 결과 1년에 20만명의 관광객들이 매화꽃을 보기위해 찾아왔다. 한창 꽃이 피는 3월~4월까지 많은 사람들이 매화축제를 다녀갔다.
올해는 섬진강기차여행 코스도 만들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지금도 달이 밝고 잠이 오지 않으면 홍쌍리 여사는 뜰에 나가 2천 200개의 항아리 사이를 걸으며 혼자 중얼거린다. "너희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노. 난 이렇게 너희들이 좋은데 내 안보고 싶더냐" 하면서 말이다.
일본의 매실농원을 가서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발톱이 5개가 빠질 정도로 골짜기 골짜기를 다니기도 했다. 그녀가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한 가지에 한 번 미쳐봐라" 한가지에 미쳐서 살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
매실꽃 만큼이나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홍쌍리 매실아지매의 인생역정.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이뤄놓고 보니 아쉬운 것이 있다.
홍쌍리 여사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청매실농원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광명소로 만들고 싶다는 홍쌍리 여사. 농촌도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생활을 할 수 있는 제 2의 고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소원이라는 매실아지매는 오늘도 수야엄마 만의 매화꽃 노래를 흥얼거리며 매화꽃길 사이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