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중퇴에 어머님은 시장에서 행상을 하시고, 어렸을때부터 공장에 취직해서 일을하다가
자신의 길을 찾아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코스닥에 상장까지 시킨 손오공이라는 완구사업 및 최근에는 엔터테이먼트 사업까지 확장하고 있는 최신규씨의 성공 스토리...
처음에 사업을 시작했을때의 기존 업체이 군림하는곳에 본인만의 마케팅, 영업전략을 개발해서 뛰어드는 부분은 많이 본받아야 할것같고, 박리다매 방식으로 100원짜리 장난감을 팔아서 몇달만에 40억을 벌어들인 이야기 등.. 흥미진진하구만...
점점 출퇴근길에 엄길청의 성공시대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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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을 터뜨린 사람들]④'여의봉을 든 손오공' 최신규 손오공 사장
가난ㆍ못배운 恨에 이 악물었다
19살에 밑바닥서 사업 시작… 요술 부리듯 무한한 상상력 발휘
아이들 눈높이 맞춘 '탑블레이드' 大히트… 한국 대표 완구社로
최신규는 손오공이다. 여의봉으로 요술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구름을 타고 단숨에 10만리를 날아오르는 손오공. '81난(難)' 끝에 불전을 구하는 손오공. 최신규 사장(48)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요술 같은 아이디어로 대박을 터뜨린다. 회사 이름도 손오공이다. 그는 여의봉을 '꿈'으로 읽는다.
열셋에 염산 냄새를 견뎌내며 금 세공일을 하고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던 소년이 거짓말처럼 1000억원 매출을 눈纜?둔 회사의 사장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만든 제품만 1000여개, 특허 300여개, 탑블레이드로 대표되는 한국 완구업계의 대표적인 대박, 코스닥 입성을 눈앞에 둬 거부(巨富) 반열에 오르게 될 최 사장은 삶의 행로는 평균인의 궤적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만 그는 여의봉으로 오늘도 꿈을 꾼다.
◆가진 것이 없어서 성공했다=최 사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밑바닥에서의 출발이 오히려 그를 오늘날 '손오공, 최신규 사장'을 만들어냈다.
세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행상을 하던 어머니는 가난을 못이겨 그를 시골 큰형님 집에 맡겼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 학교 다닐 형편이 안됐던 그는 폐건전지를 만지작거리며 장난감 삼아 놀았고 온갖 상상력을 통해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공부보다 기술에 뜻을 둔 그는 열셋부터 금은방에서 금 세공사로서 일했다. 매일 독한 염산 냄새를 맡아가며 18시간이 넘게 일하는 고된 일이었다. "힘들었지만 이때 배운 금 세공기술 덕분에 나중에 다른 기술을 익히는 데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금 세공사로서의 일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금도둑의 누명을 쓰고(나중에 아닌 것으로 밝혀짐) 금은방을 나온 그는 영등포 뒷골목을 헤매며 방황했다. 다행히 지금은 목사가 된 장애인 친구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려 선반과 주물기술 등을 닥치는 대로 익혀갔다. "친구가 그러더군요. 팔다리 멀쩡한 네가 나보다 못한 게 뭐 있냐고요."
사실 최 사장의 어릴적 꿈은 판ㆍ검사였다. "텔레비전에서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병철 회장 등을 보면서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판ㆍ검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학으로 육법전서를 보면서 고시공부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한계에 봉착했고 결국 공부보다는 기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학업에서 기술로 인생의 방향을 틀고 1974년 열아홉 나이에 셋째 형과 수도꼭지 만드는 협성공업사라는 회사를 세웠다. "가진 것 없는 제가 학교는 못다니니까 회사를 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명예는 따라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회사는 30년 뒤 손오공이라는 회사를 만드는 출발점이 됐다.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열등감이 오히려 성공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게 했고 30년이 지난 오늘, 손오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던지는 한마디.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만 만든다=그는 일찌감치 눈높이를 어린아이에게 맞췄다. 철저히 고객입장에 선 것이다. 항상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노는지 살펴보고 직접 만들어서 초등학생인 막내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완구는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만들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어른의 시각에서 만든 것은 절대 안됩니다." 그래서 나이 50에 가까운 그이지만 만화책은 물론 TV 개그프로그램 보는 것을 즐긴다. "젊은 세대는 빠릅니다. 속도감 있는 젊은 세대의 빠른 감성코드를 읽어내지 못하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최 사장은 '아이디어맨'이다. 수도꼭지에서 야외용 가스레인지, 그리고 각종 완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제품만 1000여가지가 넘는다. 따낸 특허만도 300여개. 끈끈이와 탑블레이드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완구는 모두 작은 아이디어와 피나는 노력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한마디로 아이디어는 사업을 지탱해주는 손오공의 여의봉인 셈.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사장 집무실에서도 항상 뭔가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디어 발굴에 힘썼다. "어린아이들이 컴퓨터만 한다고 야단치지 말고 밖에서 놀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혼자 있으면서 무엇을 가지고 놀까 생각하던 것을 시대에 맞게 바꿔주면 훌륭한 완구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난 사업에 미쳤었다=최 사장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고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왔다. 사업하느라 신혼여행도 포기했고 가족간의 휴가도 없었다. 돈을 좀 벌어도 남들처럼 집을 사기는커녕 오히려 공장에 재투자했다. 사업자금이 부족해 전세금과 결혼반지 등 전 재산을 쏟아붓는 바람에 돌도 안 지난 어린딸을 업고 신혼 초 여관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처가 친지로부터 원망도 많이 들었다.
"사실 전 사업에 미쳤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사업기반부터 닦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에 대한 열중은 그에겐 재미였고 그 때문에 더욱 빠져들 수 있었다. "겉으로 보면 편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고생아닌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다만 전 제일을 고생이라기보다는 재미로 받았들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팽이로 꿈을 돌리다=손오공의 최대 히트상품 탑블레이드. 탑블레이드는 팽이의 21세기 버전이다. 팽이(top)에 칼날(blade)을 단 장난감. 최 사장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어렸을 때 팽이를 돌리면서 놀았죠. 그걸 시대에 맞게 바꾼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갖고 놀았던 팽이를 오늘로 가져온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축(軸)을 중심으로 둥근 동체가 회전운동을 하는 완구라는 팽이의 기본 틀은 변함이 없다. 여기에 회초리로 치는 게 아니라 줄로 당기면 팽이가 발사되고, 빠른 속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곧바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21세기를 덧붙인 것이다.
'팽이라니' 하며 처음 주위의 반응이 냉담한 것은 당연한 일. "지금 안 하면 내일이 없다"고 설득하면서 밀어붙였다.
이때 생각한 게 일본과 합작. 한국과 일본은 노는 문화가 비슷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도 생각이 미쳤다. 애니메이션, 완구, 게임을 함께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생각한 것이다. 총 제작비 60억원 중 20억원을 손오공이 투자했다. 최 사장 입장에서는 '올인'이었다.
"일본에서 먼저 만화영화를 방영해본 뒤 반응을 보기로 했습니다." 2001년 2월 일본에서 먼저 '베이 블레이드'라는 이름으로 만화영화가 상영됐고 주인공들이 갖고 놀던 팽이완구도 출시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한국에서 완구를 내놓자마자 사무실은 주문전화로 가득했고 인천 공장을 24시간 돌려도 주문량을 맞추지 못했다. 중국산 모조품이 들어올 정도였다.
만화 주인공이 'GO! GO! 탑블레이드'를 외치듯 손오공도 질주했다. 탑블레이드 한가지로 4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여기에 컴퓨터 게임용 탑블레이드가 출시돼 3주 만에 5만장이 팔리는 빅히트를 기록했고 캐릭터를 이용한 '탑블레이드 빵'까지 나오는 등 팽이를 기반으로 한 '원 소스'로 1000억원대에 가까운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2001년 출시 이후 52개국에서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중이다.
◆삼성전자가 망하지 않는 한 나도 잃지 않는다=그는 투자에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 기술자이기 때문이다. "돈만 갖고 있는 사람과 기술이 있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기술이 있는 사람은 투자하는 데 자신이 있지만 돈만 있으면 투기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부도나지 않는 한 손오공도 부도가 날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최 사장은 애니메이션 '오세암'에 투자했다. "사업가의 눈으로 보면 종교적으로 얘기가 흐르면 안되죠. 불교를 배경으로 한 오세암의 경우 교회에 다니는 부모들은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거죠. 창투조합에 들어 있어 6억원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저는 반대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실패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돈만을 생각해 투자하지 않는다. '연지' 인형이 대표적인 예. '후배들이 이어갈 기반을 닦아주기 위해서 한국형 인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한국산 인형을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을 동원한 철저한 고증을 했고, 하나 하나 다림질과 바느질을 해가면서 한국형 인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적자였지만 지금은 흑자로 돌아섰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장난감 애프터서비스(AS)를 한 것도 당장은 손해지만 멀리 본 투자였다. 장난감이 망가지면 또 사준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절반도 안된다. 텔레비전처럼 AS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택배비로만 수억원이 나가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오히려 매출이 오른다는 것이다.
정리=전창협ㆍ권남근 기자(jljj@heraldm.com)
사진=이존환 기자(nani@heraldm.com)
[내 인생의 한컷]강도에 부도설 등 시련
용기ㆍ자신감으로 극복
30분이나 지났을까요. 야구방망이는 부러졌고, 휘두르는 칼을 온몸으로 막는 과정에서 손과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됐습니다. 피는 철철 흘러 넘쳤고 전 정신을 잃고 쓰러졌죠. (손과 얼굴의 흉터자국을 가리키며) 이곳이 바로 그때 다친 상처입니다. 이 사건으로 아내는 1년 동안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요. 강도사건 이후 아무 문제 없던 회사엔 부도설이 나돌았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데 얼마 후 회사에 도둑이 들어 금고를 털어가는 절도사건까지 났다고 하더군요. 강도, 부도, 절도로 이어지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아내와 회사를 위해서라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원에서 이를 악물고 운동을 했고, 남몰래 마사지를 받으며 몸도 추스렸습니다. 몸은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정신력 하나로 버텼습니다. 학연도 돈도 없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용기와 자신감뿐이었습니다. 아내도 저의 이런 강인함을 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완전히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있었습니다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10대: 1956년생이다.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집이 가난해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다. 13세부터 금 세공사로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학교는 기술을 배우는 틈틈이 다녔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다. 방황도 있었다. 꿈은 판ㆍ검사였지만 일찌감치 접고 19세에 형과 함께 수도꼭지 만드는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20대: 주말도 없이 일했다. 79년 경기침체로 중소기업이 쓰러졌고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83년 개봉동에 서울다이캐스팅을 차려 야외용 가스레인지와 녹즙기를 만들었다. 85년 서울화학이라는 장난감 공장을 차렸다. 끈끈이를 만들어 대히트를 쳤다.
△30대: 90년 서울양행을 만들어 장난감 자동판매기사업에 뛰어들었다. 92년 서울화학과 서울양향을 합병해 손오공을 설립하고 장난감 로봇에 집중했다. 끈질긴 노력 끝에 일본 2위 완구업체인 다카라와 기술제휴도 맺었다. 판로가 없어 위기에 봉착했으나 젊은 상인들을 모아 완구총판을 만들어 해결했다. 95년 '연지'라는 브랜드의 한복 인형도 출시했다.
△40대 오늘, 그리고: 완구시장 확대를 위해 애니메이션(만화영화) 사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96년 '영혼기병 라젠카'를 비롯해 5년간 160억원의 투자손실을 입었다. 이후 만화영화 '하얀마음 백구'를 성공시켰고 2001년 일본과 함께 팽이를 소재로 한 '탑블레이드'를 제작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완구 탑블레이드도 날개 돗친 듯 팔려나갔다. 지난해 매출액 680억원을 기록했고 올해는 10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엔 정부가 인정하는 신지식인에 선정됐고, 올 3월엔 한양대에서 명예경영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조만간 코스닥에도 등록할 계획이다. 앞으로 손오공을 게임, 캐릭터, 애니메이션 등을 총망라하는 종합엔터테인먼트 업체로 키울 생각이다.
최신규의 성공코드
◆팽이: 팽이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아침 5시면 일어나고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온다. 스스로 일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팽이를 돌리듯 일이 재미있다.
◆로봇: 94년 히트상품이었던 변신 로봇 '그레이트 다간'처럼 변신을 자주한다. 금 세공에서 출발해 수도꼭지, 장난감, 요즘 들어 애니메이션, 게임, 레저까지 젊은 세대에 맞춰 발빠르게 변화한다.
◆인형: 돈이 되지 않는다고 말리는 전통인형을 만들었다. 한국을 알리고 한국 인형의 맥을 잇겠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한 일이다. 한땀 한땀 인형을 만드는 정신으로 사업을 키워왔다.
◆만화: 인생이 드라마다. 가난, 배고픔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열아홉에 회사를 만들었다. 잘 나갈 즈음 강도를 당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다.
◆끈끈: 생애 최초의 히트작이 '끈끈이'다. 일에 몰두하면 끝장을 본다. 8개월을 쏟아부어 끈끈이 개발에 성공했다. 내 인생도 끈끈하다.
◆백구: 애니메이션 투자의 성공은 '하얀마음 백구'부터다. 흰둥이처럼 순수하다. 항상 어린이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어린이처럼 생각한다. 만화와 개그가 취미다.
◆요술:여의봉처럼 아이디어로 뚝딱 장난감을 만들어낸다. 그의 손만 거치면 옛날 팽이도 탑블레이드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1000여개 제품을 만들었고 300개 특허를 따냈다.
◆동화='TV동화 행복한 세상'을 지원하고 있다. 동화처럼 가슴에 와닿는 일을 하고 있다. 따뜻하고 감동이 있는 세상을 꿈꾼다. 좌우명도 효(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