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칠, 토종 등산화에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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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만나본 무대포 정신의 사장님...^^;;
도 아니면 모 정신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잘되신것 같습니다.
영업사원으로 시작해서 주위에서 인정을 받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주위의 도움으로 창업을 해서 여러 어려움을 격었지만 개발에 개발을 거듭하는 도전끝에 현재의 트랙스타라는 메이커로 국내시장점유율 50%에 이제는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남들은 이정도면 됬지.. 이제 이걸로 먹고사는거야라고 할때... 다시 시작하는 모습에 혀를 네둘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권동칠사장의 사회초년기 모습을 보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싹수를 보면 그 끝이 보이는듯 합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것은 아니겠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노력하고 열심히하는 사람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성공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막연한 방향없는 노력은 소용없다는것... 확고한 신념... 핏빛처럼 뚜렸한 목표...

한가지 덧붙이자면... 사양산업이란 없다는것... 언제나 최고의 자리는 없다는것... 그래서 희망이 있다는것.... 잊지 말자...


[중소기업 성공학] (주) 성호실업 권동칠 사장

형형색색 '맞춤신발'로 이끈 신발혁명

대표적인 사양업종인 신발산업에 겁없이 뛰어든 중소기업인이 있다. 은행빚 한푼 얻지 않고 공장을 돌려 1억4000만달러어치의 신발을 수출한다. '신발의 힘'은 창의력에서 나온다.

곽희자 자유기고가


    80 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는 한국 신발산업의 최고 전성기였다. 당시 신발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부산에서는 500여개에 달하는 신발공장이 엄청난 수출물량을 소화해 내느라 밤새 불야성을 이뤘고, 각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이들 업체는 해마다 40억달러어치가 넘는 신발을 해외로 수출, 세계 신발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인건비가 급상승하자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에만 의존해왔던 많은 신발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어렵게 살아남은 기업들도 인건비가 싼 대만이나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 갔다. 그 결과 현재 부산에 남은 신발업체는 80여개. 총수출액은 8억달러, 세계 신발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 가운데 대부분을 대만이 생산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신발산업의 사양화가 극명해진 지금,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 바닥에 뛰어든 작은 거인이 있다. (주)성호실업의 권동칠(權東七·44) 사장이다. 권사장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일 수 없다. 신발 수출국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겠다”며 ‘21세기 신발혁명’을 야무지게 다짐한다.


부채비율 0%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 388-2번지 1000여평 부지에 자리한 성호실업 마당 앞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수입해온 원단을 하역하거나, 각국으로 실려나갈 수출용 신발을 싣는 컨테이너 차량들로 붐볐다. 사무실이 있는 4층짜리 붉은 벽돌건물의 2층과 4층에선 중국 공장에서 재단해 온 신발 밑창들이 윗부분과 부착돼 완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등산화만도 하루에 2000켤레. 같은 크기의 컨테이너에 컬러 TV를 가득 실은 쪽보다 신발을 실은 쪽의 수출가격이 더 높다고 한다. 신발의 부가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성호실업은 88년 창업 이래 신발 외길을 걸었지만 지금껏 실패를 맛보지 않고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한 푼의 부채도 없이 출발, 설립 첫해에 500만달러 수출탑을 안았고, 이듬해엔 100% 성장해 1000만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그 후 매년 100%를 넘는 성장세를 과시한 성호실업은 누구랄 것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간 ‘IMF 시절’에도 전과 다름없이 신입사원을 뽑았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겨 적극적인 공격경영을 펼친 것.

성호실업의 지난해 수출액은 1억4000만달러. 회사규모는 커졌지만 아직도 은행 부채비율은 0%다. 설립 10년 만에 한국 신발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선두기업으로 부상했다.

권동칠 사장은 55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2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줄줄이 다섯이고, 그는 여섯 번째다.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다. 당시 이들 열 식구의 ‘밥줄’은 논 여섯 마지기가 전부였다.

“하루 세 끼를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10시 반쯤 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지요. 밥도 고구마나 감자가 주였고, 사이사이에 보리나 쌀이 몇 톨씩 섞인 정도였어요.”

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가기는 다반사였고, 수학여행도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가난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장남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보냈다. 대신 딸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걸핏하면 집으로 쫓겨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이 집 저 집을 돌며 돈 빌리기에 바빴다.

“수업료를 빌리러 스물여덟 집을 돌아다닌 날도 있어요. 이미 돈을 빌린 적이 있는 집은 아직 갚지 못해 염치가 없어 못 가고, 안 빌린 집만 골라 다녔죠.”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권씨는 그렇듯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밖에 몰랐던 20대

수업에 자주 빠진 데다 집에서도 차분하게 공부할 여건이 못 된 탓에 기초가 부족했던 그는 삼수 끝에야 어렵사리 동아대 경제학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이번엔 학비가 문제였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는데, 밤에 공부할 시간을 내려면 공무원만한 직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산지방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부산시 서구청 수도과. 여기서 몇 달 일하다 동사무소로 옮겨 2년간 근무했다. 그때 봉급으로 자신의 등록금을 댄 것은 물론, 대학입시에 떨어진 동생을 데려다 재수를 시키기도 했다. 형의 뒷받침 덕분에 동생은 경북대에 진학했다.

그는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면서 사표를 내고 공무원직을 그만뒀다. 말단 공무원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는데다, 무엇보다 고리타분한 공무원 노릇이 자신의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 후 남은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중견 신발업체인 (주)세원에 해외영업 공채 1기생으로 취업을 했다. 신발과는 이렇게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말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5분 대기조 돌격대원 같았죠. 자고 나면 총알같이 튀어나와 7시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근무 시작 전에 외국어도 배우고, 운전도 배우면서 스스로를 계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근무가 끝난 후에는 거의 매일 바이어를 접대하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

그 후 6년 반 동안 그는 일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바깥에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 구내 식당에서 눈이 맞은 영양사와 결혼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끌려 결혼을 마음먹었다는 아내 성정임씨(42)는,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둔 후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남편이 ‘하숙생’이 돼버리자 말을 잃어 버릴까 봐 혼자서 책을 소리 내어 읽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아 선택한 남편에게 일 좀 그만하라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권씨는 철저한 영업맨이었다.

“업무에 관한 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다그쳐대니까 나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그만둔 직원도 많았어요.”

5%를 더 받아내려고 바이어들과 몇 시간씩 붙어 싸웠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매사에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사장은 권씨의 능력을 인정, 그가 소신을 펼 수 있도록 누구에게보다도 많은 배려를 해줬다. (주)세원은 그가 입사할 당시 직원 1000명에 수출액이 1000만달러 정도였지만, 그가 회사를 나올 무렵엔 직원이 4000명, 수출액이 1억2000만달러에 이르는 큰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외국 업체들, 잇따라 사업 제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한 그에게 어느 날 거래처였던 영국 등산화 업체 하이텍사(社)가 함께 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해 왔다.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한창 회사도 커나가고 영업책임자로서 일에 재미를 느끼던 때라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그때 거래하던 바이어 중에 하이텍은 그다지 비중 있는 회사도 아니어서 마음을 두지 않았죠.”

그러나 하이텍의 권유는 끈질겼다. 한국 업체들의 임금이 상승해서 제대로 신발을 만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신발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가진 권씨를 붙드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하이텍은 30만 달러를 회사 설립자금으로 무상 지원하겠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결국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거의 떠밀리다시피 독립해 나오게 됐다.

“회사를 차린다고 하니까 세원에서 뒷조사를 시켰나봐요. 그때만 해도 영업하던 사람이 공장을 차려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다른 사정이 있나 싶었던 거죠. 뒤에 내가 정말로 회사를 차린다는 걸 알고 나서는 ‘빨리 망하고 돌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때껏 모아둔 전재산 3000만원을 공장 전세금으로 걸었다. 하이텍이 준 자금이 그때 우리 돈으로 2억 5000만원쯤 됐는데, 이런저런 생산설비를 구입하는 데 1억7000만원을 쓰고, 8000만원은 은행에 예치했다. 88년 사무직 6명, 생산직 60명의 직원들과 공장문을 열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처음부터 부채 없이 사업을 시작한 덕분에 물건을 만들어 납품한 만큼 이익금은 그대로 은행계좌에 입금됐다. 회사는 이후 5년간 해마다 100%씩 성장했는데, 그 사이에 공장에 세 차례나 불이 났다. 92년의 첫 화재 때는 창고가 불타 2억원의 피해를 보았고, 그 이듬해엔 쓰레기장에 불이 나면서 건물 일부를 태웠다. 그 몇 달 후에 다시 큰 불이 났는데, 이때 하역을 기다리고 있던 신발들을 고스란히 태워 5억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권사장이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공항에 내려서 회사에 별일 없느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불이 났다고 해요. 헐레벌떡 뛰어와 보니 공장 2, 3층이 모두 탔는데, 납품할 흰 운동화들이 모두 새카맣게 타 재로 변해 있더군요.”

출장길에 동행했던 아내는 타버린 공장이 눈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서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소매를 둥둥 걷고 잿더미가 된 신발들을 치우고 있더란다.

“이미 ‘상황 끝’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이럴 때는 지금의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빨리 수습하고 새 출발하는 방법밖엔 없어요.”

권사장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위기와 시련이 닥쳐왔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곧바로 이를 뛰어넘을 길을 모색하는 태도에 있다.

매사를 이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헤쳐가는 사람에겐 하늘도 길을 열어주는 모양이다. 그 해 5월 스키 전문업체인 미국의 K2사 바이어가 찾아와 자신들이 개발중인 인라인 스케이트(일자형 롤러스케이트)를 성호실업과 함께 만들고 싶다고 제의했다. K2사가 유수의 신발업체를 제쳐놓고 성호실업을 택한 것은 일찍부터 성호의 등산화 제조기술을 눈여겨봤기 때문.

권사장은 그 무렵 시판되던 일자형 롤러스케이트들이 모두 스키 부츠처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딱딱하고 무거운데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발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성호가 만들던 경등산화 재질을 이에 접목시키자고 제안했다. 시험 삼아 플라스틱을 경등산화 재질로 바꾸고 내피를 없애니 신발이 훨씬 가벼워진 것은 물론, 통풍도 잘 되고 발이 편했다. 결과에 흡족한 K2는 즉각 권사장과 계약을 체결했다. 제품은 성호가 독점 공급하기로 했다. 권사장은 이 기술로 국제특허를 냈고, 그때껏 꾸준히 성장해온 성호실업은 K2에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를 독점공급하면서 ‘수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독자 브랜드 ‘트렉스타’ 개발

성호의 기술로 만들어진 인라인 스케이트는 생산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국내 공장만으로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제때 대기 어려워지자 95년 중국 톈진(天津)에 대지 8000평, 종업원 2500명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현재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는 세계 롤러스케이트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장 곳곳을 구석구석 보여주던 성호실업의 홍보담당자는 단 한 곳만은 외부인 접근금지 구역이라며 출입을 막았다. 개발실이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기술을 개발, 관리하는 방이라고 했다. 미국의 K2 본사 직원들이 제품의 기술 보안을 위해 그 방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현재 성호실업은 매출의 80%를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로 올리고 있다.

창업 계기가 된 하이텍 제품 생산은 5년 만인 93년에 그만뒀다.

“노사분규가 심화되면서 인건비가 해마다 가파르게 올라갔죠. 우리 회사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이텍 제품은 중급이었는데, 임금이 계속 높아지다 보니 우리도 하이텍도 모두 타산이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옮겨가게 하고, 우리가 지원받았던 장비와 기술도 모두 이전해줬습니다.”

하이텍이 철수한 후 성호실업은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자체 브랜드 개발이었다. 94년 권사장은 자체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OEM에만 의존해왔던 회사 경영형태를 새로운 생산체제로 전환시켰다. 이 브랜드가 바로 ‘트렉스타(TREKSTA)’. 트렉스타는 ‘TREK(여행)’과 ‘STAR (별)’의 합성어로, ‘험난한 산행을 할 때나 눈 위를 달릴 때 길을 밝혀주는 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인건비 상승으로 외국 기업들이 임금이 싼 대만이나 동남아 국가로 하청생산 공장을 옮기자 신발업체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사라져갔다. 이처럼 신발산업은 이제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모두들 물러날 때, 권동칠 사장은 오히려 더 과감한 투자를 통해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되 특수화 분야를 집중 공략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확신을 갖고 연구인력을 집중 투입, 질 좋은 등산화와 스노보드화를 만들어냈다.

스노보드화의 경우 그 전까지는 안쪽과 바깥쪽이 분리된 투 피스 구조로 되어 있어 신고 벗기가 불편하고 손질과 보관 또한 어려웠다.

권사장은 이런 단점을 보완, 원 피스 형태의 스노보드화를 만들었다. 투 피스 형태를 불문율처럼 고수하던 당시 스노보드화업계에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전세계 시장의 60%가 원 피스 형태로 바뀌었다. 성호의 스노보드화는 일본의 스키용품 전문업체인 나라스포츠가 판매를 대행하고 있는데, 일본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개념의 제품 개발을 선도해온 권사장은 완전 방수가 되는 등산화인 고어텍스도 국내 업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고어텍스 개발은 중(重)등산화를 경(輕)등산화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국내 등산화 생산업체는 10여개사. 그 중 트렉스타의 등산화 점유율은 50% 정도다. 다른 등산화에 비해 값이 비싸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있지만 신어본 사람들은 다시 찾는다고 한다.


꿈에도 신발만 생각한다

성호에서 생산하고 있는 등산화는 모두 50여종. 그중 30여종이 국내에서 시판된다. 트렉스타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은 등산화, 스노보드화, 스케이트화, 샌들 등인데, 수출이 30%, 내수가 70%를 차지한다. 수출국은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등 10여개국. 앞으로 30여개국으로 늘려 나갈 계획이다.

지난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자 성호실업은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의 이름을 딴 등산화 ‘비로봉’을 내놓았다. 가격을 기존 제품들보다 저렴한 6만원대로 낮추고, 금강산 관광객 중에 고령자가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 신발 무게도 켤레당 640g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금강산 관광객의 20%가 이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권사장은 트렉스타가 고가여서 중급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97년에는 ‘레저타임’이라는 중저가 상품을 개발했다.

권사장이 여느 중소기업인과 달리 실패를 모르고 성장을 거듭해온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해수욕장에 피서 가도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 발만 살펴보다 오지요. 달리는 기차 바퀴를 보면 저 모양을 어떻게 신발로 옮겨 볼까, 절에 가면 탱화의 색채와 문양을 어떻게 신발에 담아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물을 신발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신발만 잔뜩 나오는 꿈까지 꿔요.”

권사장은 “신발사업의 관건은 창의력인데, 이 창의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아이디어를 낚아챌 준비가 돼 있을 때 살이 붙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날 세 살짜리 조카의 발이 자라 얼마 전에 새로 산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신발도 발에 따라 커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게 됐다. 신발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신발은 연구단계에 있는데, 내년 봄쯤이면 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개발중인 제품은 왼쪽과 오른쪽 모양이 다른 신발이다. 따로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짝 같지만 함께 놓으면 잘 어울리는 한 켤레의 신발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옷은 좌·우가 달라도 전체적으로는 잘 어울려 보이는 데서 착안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권사장은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이 뒤따르지 않으면 가뜩이나 여건이 좋지 않은 신발산업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성호실업은 매년 매출액의 5∼10%를 연구개발비로 지출한다. 98년 정식 연구소 등록을 마친 성호실업 연구소에서는 40명의 연구원들이 매년 두 종류 안팎의 새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연구중인 가장 큰 프로젝트는 ‘맞춤신발’.


맞춤신발의 대중화

“4000만 국민의 발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칼처럼 길쭉한 발이 있는가 하면, 마당쇠 발처럼 넓적하고 뭉툭한 발이 있고, 발바닥이 편평한 발이 있는가 하면 오목한 발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팔리는 신발들은 발 모양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사이즈만 달리한 것이에요. 그러니 발이 편할 리 없죠. 이제는 각자 특유의 발 모양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 주자는 겁니다.”

맞춤신발이란, 매장에 온 소비자들의 발 모양을 컴퓨터로 스캐닝해서 공장으로 전송하면 24시간 안에 제품을 만들어 48시간 안에 소비자들이 신발을 받아 신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캐주얼화를 만드는 영국의 클라크사나 골프화를 만드는 풋조이사가 이런 맞춤신발을 생산하고 있지만, 가격이 켤레당 1000달러 정도로 매우 비싼데다, 제작과 배달에 소요되는 기간도 2주일이나 돼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것.

권사장은 이런 단점을 없애 값은 100달러 미만으로 하되 이틀 안에 소비자에게 택배가 가능한 맞춤신발을 대중화시킬 생각이다.

성호의 현재 기술력으로는 정상적인 발 모양을 가진 사람을 위한 맞춤신발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사고를 당했거나 날 때부터 기형적인 발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직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 권사장은 이에 대한 연구가 끝나는 내년 상반기에는 소비자들이 자기 발에 맞는 맞춤신발을 신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품은 등산화에서 평상화까지 어떤 신발이든 다 가능하다는 것.

그는 “맞춤신발의 대중화는 신발산업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성호실업에는 맞춤 신발 기술과 관련한 계약을 맺으려는 외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권사장은 맞춤신발 시대가 열리는 21세기에는 1조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이에 대비해 중국 톈진에 대지 1만5000평, 직원 2500명 규모의 제2공장을 건립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권사장은 언제나 자신이 진두에 나서 회사를 이끌었다. 직원들은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큰 방향만 제시하고 직원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회사를 꾸려가게 유도한다. 그랬더니 혼자 해왔던 과거 10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힘이 느껴진다고 한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권사장. 회사가 성장해도 신발산업 바깥으로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그는 두 개의 꿈을 갖고 있다. 자식과도 같은 트렉스타를 국제적인 명성의 브랜드로 키워내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세계 최대 신발 수출국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노력하면 문이 열리고 길이 보인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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